"근대소설 효시 ‘혈의 누’ 경매, 시작가 7천만원."

서울신문 11일자 29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혈의 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혈의 누>는 1908년에 찍어 낸 재판본이다.

서울신문은 이 기사에서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를 “1894년 청일전쟁 때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은 7살 여주인공 옥련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 주는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파란만장한 삶’ 안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작가 이인직은 만고의 역적 이완용의 측근으로 한일합방 때 막후에서 열심히 뛰었다. 이토 통감의 의중을 몰라 애태우던 이완용은 1910년 8월4일 자신의 측근인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에게 보내 일본의 본심을 확인한 다음 먼저 합방을 제의했다.

뒷날 고마쓰는 이인직이 먼저 찾아와 이완용의 합방 제안을 전달하자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완용이 이인직을 보내 이토보다 먼저 합방을 제의한 건 합방의 공을 송병준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이인직은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을 위해 맹활약한 공으로 일왕의 훈장까지 받았다. 그 훈장의 공적조서에 적힌 이인직의 직업은 ‘간첩’이다. 공훈 기록엔 "적군 러시아 군대가 점령한 원산에서 적정을 살피다가 포로로 잡혔던 이인직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해 밤길을 걸어 아군(일본군) 진지에 도착해 적정을 소상히 알렸다"고 적혀 있다.

이인직은 1900년 2월 고종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정치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고마쓰는 이 학교 교수였다. 돈 없는 조선이 나랏돈으로 관비유학생을 보냈는데 그렇게 배운 지식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고 나라 팔아먹는 데 사용했다. 나랏돈으로 매국에 여념 없는 현재의 식민사학자들과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일전쟁에 휘말리기 싫어 1903년 2월 관비유학생 소환령을 내렸지만 이인직은 이를 거부하고 미야코신문사 수습기자로 들어갔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이인직은 이완용(노론)과 송병준(일진회) 두 매국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이완용 편에 섰다. 평민 출신이 모인 일진회가 인조반정 이래 집권세력인 이완용 같은 노론을 이길 수 없다고 봤다. 이인직을 밀사로 보낸 이완용이 가장 알고 싶은 건 매국의 가격이었다.

<혈의 누> 줄거리도 친일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주인공 옥련이 청일전쟁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당했지만 일본군에게 구출돼 이노우에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닌다”는 내용이다.

이인직이 <혈의 누>를 만세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1906년 7월22일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초대통감으로 부임해 한국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많은 국민이 이토의 통감통치에 분개할 때 이인직은 “일본군이 조선 처녀를 구했다”는 내용의 소설을 연재했다. 이는 철저히 정치소설이다. <혈의 누>는 우리말로 ‘피눈물’이다. 그런데 일본어 ‘노(の)’를 넣어 일본식으로 표기했다.

이런 소설을 두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혈의 누>를 “개화기 시대상을 그린 것으로, 자주독립과 신교육 사상을 주제로 다뤘다”고 평가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