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김원씨가 쓴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를 지난해 10월 우연히 접했다. 당시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집 여주인은 작가였다. 그는 작품을 쓰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대강 훑어보니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실관계가 왜곡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저자가 설정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무리하게 논지를 이끌어 간 점이 눈에 띄었다. 19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과 전태일 정신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오해와 굴절된 시각이 굳어질까 염려됐다.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을 학자도 아닌 사람이 반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이 출판된 지 오래돼서 시의성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도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인식이 재생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번 주제는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민감한 것들이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말을 많이 들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심정으로 일부러 흘려들었다. 동의하고 공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선배대접 해 주고, 인간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생각은 다르더라도 그냥 참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사실인 양 굳어지고 잘못된 인식이 진실로 둔갑을 하는 듯하다. 그래도 그것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다행이다. 진실로 둔갑한 것이 또 현실이 돼서 새로운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이 전태일 정신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에서 “노조는 쟁의행위도 하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 사측과의 힘겨루기를 통해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화시키는 조직”이라고 정의하면서 청계피복노조는 노조로서의 기능보다 민주화운동, 투쟁을 통한 문제 해결, 이소선·전태일이라는 상징 수호가 더 중요했다고 썼다. 또 “전투적 지도부와 조합원들의 잇따른 장외투쟁은 지도부의 불안정을 가져왔고 그 가운데에는 지식인의 ‘개별적인 개입’이란 문제가 결부돼 있었다”며 “청계피복노조가 전태일이라는 상징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노조의 불안정화, 기층과 지도부의 괴리라는 문제점이 드러났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재생산되고, 그것이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혼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의 생명은 자주성이다.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어떻게 투쟁했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정신적 표상인 전태일 정신은 어떻게 기억돼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어쭙잖은 반론을 쓰는 것이다.

1970년대 노동운동의 상황

우리나라 노동관계법은 노동조합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70년대 우리나라 노동조합 운동 또는 노동운동은 이와 같은 법이 보장되는 속에서 가능했을까. 결론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개됐다는 것이다.

70년대 자주적인 노동운동의 서막은 70년 11월13일 전태일 분신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서 시작됐다. 전태일 분신은 60년대와 70년대 산업화를 위해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고도성장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른바 ‘개발독재’가 낳은 사건이다. 노동자는 법으로 보호를 받는 최소한의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은 현실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를 죽음으로 외친 것이다.

전태일 사건은 당시 반공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어용 한국노총만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기층 노동자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노동문제에 무관심했던 지식인·종교인·언론인의 참회와 각성을 일깨우는 충격파를 던진 사건이었다.

그 어떤 정치적·물리적 탄압이 가해져 온다 해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생존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70년대 한국의 자주적인 노동운동은 전태일 사건으로부터 다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유지·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이 자주적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70년 전태일 사건 이전 우리나라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한국노총은 노동조합의 생명인 자주성이 없는 노동조합, 다시 말해 어용노조였다. 한국노총은 5·16 군사쿠테타의 산물이었다. 태생적으로 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박정희 친위 쿠테타인 유신을 지지하는 어용행각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치열하게 생존권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의 원성을 샀다.

전태일 사건은 자주성이 없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저항이었다. 전태일 사건 이후 현장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터져 나왔고 이어 자주적인 민주노조들이 하나둘씩 탄생하게 됐다.

자주적인 노조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투쟁을 이끌어 낸다. 그런데 70년대에는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제도와 탄압이 극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노동 3권이 제한돼 쟁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쟁의권이란 노동자가 가지는 유일한 무기인데, 그 무기를 법적으로 빼앗아 버렸다.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기본권을 박탈한 셈이다. 이어 박정희 군부독재는 유신헌법상 긴급조치를 발동해 언론·집회·결사 심지어는 스스로 생각할 자유까지 박탈했다.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고충처리나 정부 시책에 충실히 따라 노동통제 수단으로 전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근로기준법조차도 지켜지지 않은 인간 이하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생존권 투쟁은 법으로 막는다고 해도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른 민주노조들은 가급적이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개하고 문제가 사회화되는 경우 단위노조는 사측과 공권력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청계피복노조의 경우 단위사업장 노사문제가 사회화되는 것이 오히려 일상적이었다”고 썼다.

“가급적이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라는 말은 지금에 와서 들으면 그럴듯하고 고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는 현실을 모르고 단지 책상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분석한 말장난에 불과한 말이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그러면 전태일이 분신하기 이전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기나 하고 말하는 소리인지 모를 일이다. 법을 지키라며 한 생명을 바쳐 가면서까지 절규를 해야 했던 그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박정희 유신독재는 법적으로 권리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를 정점으로 하는 정보당국을 이용해 노조를 감시·통제했다. 심지어 정보당국은 청계피복노조의 상급조직인 어용노조를 통해 노조 간부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급적이면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보당국 혹은 어용간부의 감시·통제를 벗어나면서 생존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답은 둘 중 하나다. 생존권을 포기하고 노예적 삶을 살거나 법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어용노조를 하면서 안주하느냐, 아니면 노동자의 자주성과 자존을 지키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느냐.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바뀌고 노선이 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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