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자운 반올림 상임활동가

“노동자가 산업재해 신청만 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조사를 다 해 주지 않느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입증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측의 주된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2011년 반도체 직업병 논란으로 입증책임 전환 요구가 커졌을 때 당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원장은 기고를 통해 “업무 관련성에 대한 조사를 근로복지공단이 하고 있으므로 입증책임은 공단이 진다”고 썼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입증책임 전환을 권고했을 때에도 고용노동부는 “현행 산재보험 제도상 조사 및 증명에 대한 책임이 근로복지공단에 있으며, 피해근로자는 산업재해라는 주장(신청)만 하면 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2015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해자 입증책임 위헌 여부가 논의됐을 때에도 노동부는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재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실질적으로 조사·수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입증책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입증책임이란 입증 ‘행위’를 누가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입증되지 못한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 조사를 누가 하건, 재해자가 처했던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회사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거나 은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재해자 입증책임 원칙상 밝혀지지 않은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것이 입증책임 문제의 본질이고, 수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이 산재보험 제도의 보호범위 밖으로 내몰리는 이유다. 따라서 누가 재해조사를 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실한 재해조사,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가

또한 근로복지공단의 재해조사를 앞세우는 정부로서는 이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그 조사라는 것이 매우 부실하게 이뤄져서 업무환경의 유해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재해자가 결국 산재 불승인 처분까지 받게 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지는가.

산재보험법상 공단은 재해조사에 관한 독점적 권한을 갖는다. 반면 재해노동자들은 무거운 입증책임을 부담할 뿐 입증행위를 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공단의 재해조사라는 것은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서비스 같은 것이 아니다. 공단에게는 재해조사를 철저하게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 것이고, 만일 그 조사가 잘못 이뤄졌다면 마땅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단 재해조사가 부실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공단은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2014년 11월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 사망사건과 관련해 법원은 이례적으로 공단 재해조사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공단측은 고인이 업무 중에 노출될 수 있었던 발암물질을 측정조차 하지 않았고, 고인의 동료들이 지목한 유해인자에 대해서도 조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역학조사평가위원 중 일부가 추가 조사 필요성을 제기했음에도 조사를 종결해 버렸고, 공단은 그러한 조사 결과에 따라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두 차례 법원 판결과 공단의 무책임한 항소

법원은 그러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으며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이러한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단의 재해조사가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 대한 일종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유족들은 승소했다.

그럼에도 공단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항소이유를 봐도 법원이 지적한 재해조사 문제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자신이 재해조사를 잘못함으로 인해 업무환경의 유해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불이익은 재해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이 옳다는 태도다. 실로 무책임한 데다 몰염치하기까지 하다.

2016년 1월 법원은 다시 한 번 재해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난소암 사망사건에서도 공단은 재해자측 전문가가 주장하는 유해요인들에 대한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고인이 업무 중 노출될 수 있었던 발암물질들을 조사하지 않았으며,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평가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취급물질에 대한 유족측의 주장은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회사측 주장만을 받아들여, 결국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조사를 벌였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이번에도 법원은 2014년 판결과 유사한 취지에서 공단의 조사 잘못을 재해자측에 유리한 정황으로 참작했다. 이 사건에서도 유족들은 승소했고, 공단의 항소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입증책임 전환’을 계속 가로막고자 한다면

산재보험법상 입증책임 전환은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의 오래되고 간절한 바람이다. 사회적으로도 그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돼 왔다. 구체적인 법 개정 논의도 여러 차례 있었다. 노동부가 공단의 재해조사를 앞세워 이를 계속 가로막고자 한다면, 그 재해조사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그것이 잘못 이뤄졌을 경우에는 누가 어떤 책임을 지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옳다. 산재보상 제도의 올바른 운용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필자는 공단이 ‘질병의 업무 관련성’ 판단과 관련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공단이 일차적으로 해야 하는 그 판단은 결코 ‘질병과 업무 간의 관련성’을 ‘과학적·의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판단의 본질은 ‘산재보험제도의 적용범위’를 ‘규범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하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입증책임이 재해자에게 있다 한들, 공단의 잘못으로 입증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 마당에 그에 따른 불이익을 오롯이 재해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옳은가.

근로복지공단이 또 한 번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항소를 강행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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