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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출근 쌍용차 비정규직 복기성·유제선씨] "승리도 패배도 아닌 첫 번째 복직, 마지막 한 명이 돌아갈 때까지 지켜봐 달라"

1일 오전 8시 쌍용자동차 해고자 18명이 7년 만에 출근버스를 탄다. 지난해 12월 쌍용차 노·노·사 합의에 따라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신규채용자를 비롯한 40명이 이날부로 1차 복직한다. 복직자들은 안성 인력개발원으로 간다. 2~3주 동안 교육을 받은 뒤 일정 기간 결원자 대체근무를 하는 여유인력조인 '혁신팀'에 배치될 예정이다.

해고자 18명 중에는 정규직으로 복직하는 비정규직이 6명 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비정규직은 체불임금을 양보하는 대신 경력을 100% 인정받아 복직하게 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로 이뤄 낸 복직이다.

하지만 그들은 축하한다는 말에 웃으면서도 복잡한 얼굴을 했다. 공장 밖에 130여명의 해고자가 남아 있는 데다 "2017년 상반기까지 노사가 복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합의문구를 둘러싼 평가가 엇갈리는 탓이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8일 평택 쌍용차공장과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비정규직 두 명을 만났다. 합의와 복직을 둘러싼 기대, 아쉬움과 우려를 들었다. 또한 같은 당부를 받았다. 이번 복직은 해고라는 상처의 해결점도, 정리해고 문제의 완결점도 아니라고. 마지막 한 사람이 복직할 때까지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고.

"내 안의, 내 곁의 죽음을 견디는 게 가장 힘들었다"

쌍용차에서 비정규직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0월이다. 쌍용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을 때다. 그때 조립팀에 있던 복기성(38)씨는 설립멤버로 나섰다. 19살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기아자동차 사내하청을 거친 복씨는 시쳇말로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하지만 차별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더라도 무거운 너트를 조일 때 정규직은 4개씩, 비정규직은 8개씩 조였어요. 임금은 정규직 절반이고. 정리해고 칼도 비정규직이 먼저 맞았죠. 임금 몇 달치 체불하고 사내하청업체 강제휴업시켰다가 폐업시켜 버리고. 노조를 만들어 싸울 수밖에요."

2009년 정리해고 사태를 맞으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옥쇄파업을 시작으로 공동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공장 밖으로 밀려났고, 복직투쟁이 길어질수록 해고자들은 극한 투쟁을 해야 했다. 기성씨는 2012년 11월 두 명의 정규직과 함께 평택공장 맞은편 송전탑 위로 올라갔다. 171일의 농성은 몸에도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다.

"고공농성을 하고 있을 때 기아차 사내하청 윤주형 동지가 죽었어요. 노동자로 투쟁하던 사람이 조직도 동지도 싫다며 갑자기 세상을 등진 겁니다. 얼마나 외롭고 버티기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런 마음 없겠어요? 부고 문자 받고 그 1평짜리 좁은 고공농성장 안에서 세 명이 며칠 동안 서로 말을 안 했어요.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쌍용차에서 28명이 죽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해고됐는데, 왜 고립감도 최후의 선택도 혼자만의 몫이 돼야 하는가…. 누군가 떠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죽고 싶다는 마음이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자꾸 그 생각이 마음속에 걸려 있는 거예요. 그게 힘들었어요."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들이 버팀목"

유제선(36)씨는 지금도 옥쇄파업 시기에 날아오던 볼트와 경찰 곤봉이 불쑥불쑥 떠올라 화가 치솟는다고 했다. 제선씨는 21살에 공장에 들어와 29살에 해고됐다. 사실 현장에서도 일을 하다 보니까 계속 했을 뿐 '여기서 얼마나 오래 일하겠느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비정규직은 희망퇴직 위로금마저 정규직의 6분의 1로 책정됐다.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조에 남아 싸우기로 했다.

"친구들은 계속 말렸죠. 정규직도 아닌데 네가 왜? 정규직 복직 보장도 없는데 청춘을 거기에 허비해서 어떡하려고? 그걸 설명하기가 참 막막했어요. 친구관계가 많이 끊겼죠."

'정리해고 투쟁' 속에서 비정규직은 좀처럼 부각되지 않았다. 2011년 비정규직 해고자 4명은 평택지역 국회의원 사무실 2곳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다. 가로세로 각각 2미터, 다리를 펼 수 없어 대각선으로 누워야 하는 천막을 외롭게 지킨 6개월이 "비참했다"고 제선씨는 말했다.

"쌍용차 해고자 중에 비정규직이 있는 거 자체를 지역주민도 몰랐어요. 6개월간 농성하고, 밤마다 선전물 수천 장을 아파트에 몰래 돌리고 1인 시위를 했습니다. 그랬는데 알려지지도 않고 연대도 없고…. 고립감이 비참함으로 넘어가더라고요. 그즈음 지부 요청을 받고 대한문 농성장에 결합했는데, 대한문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부산에서, 광주에서 기차 타고 애들 손 잡고 우리 얘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누가 진지하게 우리 얘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때 알았어요. 늦게 와서 미안하다 손 잡아 주고, 몰래 봉투 놓고 가고. 그 앞에서 어떻게 복직투쟁을 포기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와중에 2013년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1심에서 승소했습니다.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죠. 투쟁을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운 거 같아요."

불안 속에 가중되는 갈등, 그러나 끝까지 놓지 않은 손

2015년 시작된 노·노·사 교섭은 사태의 전환점이었으나, 제선씨는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이 쟁점이 돼 버린 교섭 과정이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노력' 조항에 머문 복직합의가 제대로 이행될지 걱정도 컸다.

"비정규직이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지부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그렇게 주장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던 회사가 갑자기 소송 취하 안 하면 합의 안 한다는 식으로 나왔거든요. 결국 노·노·사 합의를 위해 4명은 각각 소송을 취하해야 했죠. '아이고 이 바보들아'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1심 이겼고 2심도 이길 게 뻔한데, 그럼 가만히 있으면 1인당 4억원씩 체불임금 받고 정규직 복직도 되는 건데. 다른 비정규직들에게 보탬이 되는 판례가 될 텐데.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많은 동지들이 당장은 부족해도 앞으로 복직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함께 가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를 원했으니까 합의한 거에요. 그런데 회사는 최연장자인 김정우·문기주 동지를 복직자에서 제외시켰어요. 정년 얼마 안 남았고 징계해고됐거나 복직투쟁에 헌신한, 가장 먼저 복직시켜야 할 사람들인데. 회사가 합의내용을 교묘하게 이용해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막을 방법은 안 보이고 경기도 불안하니 다음 복직은 언제일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져서 해고자들 간 다툼도 있어요. 이러다 합의의 뜻이 퇴색될까 너무 속이 상해요."

기성씨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합의의 의미를 되새겨 주기 바란다고 했다.

"최고의 합의는 아니에요. 아쉬운 점이 많죠. 개인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교섭위원 3명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교섭 내내 먼저 해고됐고 더 오래 싸워야 했던 비정규직 문제만큼은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고하게 끝까지 견지했고 최우선 해결과제로 받아안았으니까요. 쌍용차 투쟁이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출발했는데, 7년 동안 뜻을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7년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먼저 복직해야 할 사람인데 그것조차 내려놓고 합의에 서명한 사람들을 책임지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겠다고 밝힌 김득중 쌍용차지부장 같은 동지들도 있어요. 박수쳐 줘야 합니다. 쌍용차 문제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복직하기 전에는 해결된 게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시고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해고자의 시간은 다시 흐를까

복직이라는 말로 모든 걸 묻어 버리기엔 해고자들은 너무 오래 아팠다. 남은 과제도 적지 않다. 그래도 이를 기점으로 해고자들의 시간이 일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제선씨는 7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에게 복직투쟁을 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7년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아예 가족을 만나지 않았던 그다. 알고 있으면서 홀로 속을 끓이다 우울증까지 앓았다는 어머니도 이제야 가슴속 응어리를 내려놓았다. 현장에 돌아가면 동료들과 작은 것이라도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편히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 볼 생각이다. 제선씨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막 설레는 기분이 들진 않아요. 다만 우리 복직이 나머지 해고자들이 현장으로 빨리 돌아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패배라고도 승리라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 같아요. 그동안의 경험과 마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뭘 해 나갈 지 찾아가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잘못하지도, 잘못되지도 않았다는 걸 계속 확인해야만 견뎌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기성씨는 복직을 동료와 가족과의 틈을 메워 가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했다. 7년 만에 받는 첫 월급 용도도 정해 놓았다.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지지해 준 아내에게 작은 선물을 줄 계획이다.

"나로 인해, 쌍용차 정리해고로 인해 가족들까지 고통을 당하고 인간관계도 7년이나 공백이 생겼어요. 그건 되돌릴 수 없잖아요. 둘째 아이 돌잔치를 옥쇄파업 할 때 나 없이 했는데, 그게 참 슬펐어요. 복직이 그 공백을 보상하거나 치유해 줄 수는 없겠죠. 그저 앞으로 잘 메워 갈 생각입니다. 집에서, 현장에서 서로 보듬고 채워 가야죠.

공장에서 일할 때도, 해고자로 있을 때도 월급을 온전히 집에 갖다 준 적이 없습니다. 첫 월급만큼은 현금으로 몽땅 찾아서 옛날 그 노란 봉투에 담아 고스란히 아내에게 주려고요. 그동안 고생했다, 미안했다, 고맙다고 하면서요."

윤성희  miyu@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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