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소설가 박완서(1931~2011년)의 5주기를 맞아 후배 글쟁이 9명이 생전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을 냈다.(한국일보 1월25일 28면)

박완서는 한국전쟁 통에 1952년 서울에 주둔한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했다. 미군들이 들고 오는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 주는 초상화부엔 박수근 화백도 있었다. 어느 날 박수근이 화집 한 권을 옆에 끼고 출근하는데 박완서는 속으로 “꼴값하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장이가 화가가 될 줄 아냐”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박수근이 화집을 펼쳤을 때 박완서는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박완서는 늦게 문학판에 뛰어들었다. 일찍 결혼해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키워 놓고 나이 마흔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돼 등단했다. 문학지나 일간신문 신춘문예 출신이 아닌 여성지 공모전으로 데뷔했다는 콤플렉스는 그를 오래 괴롭혔다. 그래서 더욱 독하게 글을 갈고닦으면서 다작(多作)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개성에서 20리 떨어진 땅이다. 말년을 보냈던 구리시 아치울 그의 집 서재엔 5만분의 1 개성지도가 걸려 있었다. 실향의 아픔을 달래면서도 그는 맑은 샘물 같은 박적골을 자기 문학의 발원지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늘 개성상인 출신이라는 중산층 입장에 서서 산업화 과정의 하층민을 바라보며 작품활동을 했다.

70년대 그도 자유실천문인회 같은 진보문인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박완서는 “그 당시 나는 진보문인단체에 이름 올린 걸 은근히 으쓱하게 생각했고 유신 정책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서명에도 열심히 동참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박완서는 선배 소설가 이병주를 만나 무슨 말끝엔가 진보운동과 거리를 두고 사는 이병주를 비꼬면서 질문했다. 이병주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했다.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도 무너지지 않을 강한 체력과 신념이 없다.”

어려서 경남 진주의 천재로, 빨치산 출신이라는 풍문 속에 5·16 쿠데타 직후엔 큰 필화도 겪었던 이병주였지만, 필명을 떨친 이후 소설가 이병주는 외제차를 타고 와인을 마시며 엽색 행각을 일삼았다.

70~80년대 시대의 아픔을 외면했던 이병주를 비꼬았던 박완서도 노무현 정부 땐 “지금 나는 그렇게 역겨워하던 보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진보를 외치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건만 세상은 아직도 달라져야 할 이놈의 세상으로 보인다고 말했더니 남들이 나를 보수 취급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며 2007년 1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직을 반납했다.

한국 문인들은 젊은 날엔 대체로 진보 편에 서지만, 나이 들면서 오른쪽으로 기운다. 젊은 날 스스로 꼰대라고 비꼬았던 늙은 문인 대열에 동참해 자신의 젊음을 배신해 간다. 또 눈앞에 닥친 총선과 내년 대선까지 두 번의 선거전에서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돈을 찾아 정치의 대열에 줄을 설지 모르겠다.

박완서처럼 98년 아차산 밑 아치울로 하방한 뒤 조용히 지내기라도 하면 좋겠다. 이번에 나온 박완서를 기리는 대담집에는 손녀딸을 얼러 재우거나 무작정 집을 찾아온 독자를 살뜰히 챙기는 일상의 소소한 따뜻함이 담겼다.

80~90년대 요란했던 혁명 구호는 아니더라도, 늙어서도 세상을 보는 맑은 눈의 문인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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