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조끼와 모자 달린 두툼한 점퍼, 튼튼해 보이는 등산화와 등에 메는 가방까지 익숙한 모습이다. 아무 데고 주저앉는 데에도 거리낌 없다. 흔한 풍경이다. 누군가 꺼내 든 두툼한 종이 책이 다만 낯설었다. 사람들은 요즘 한자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뉴스를 검색하고,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훑는다. 종종 메신저 통해 말을 건다. '까똑' 소리에 놀란 앞사람이 그제야 다문 입 열어 말을 받는다. 바깥 집회 나선 조합원들은 사회자가 알리기도 전에 급박했던 국회 동향을 파악한다. 노사교섭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합의 내용을 읽는다. 전달한다. 속보를 공유한다. 숨 가쁜 속도에 어느덧 익숙하다. 노사정 합의 파기를 논의하던 노동조합 총연맹의 중앙집행위원회 결과를 기다리던 자리, 회의는 길었고 지루함은 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마트폰 꺼내 들고 꾸부정 앉았다. 인류 역사와 문명이 무엇을 통해 발전했는지를 짚었다는 저 두툼한 책이 거기서 낯설었다. 다음번 책 제목은 <총, 균, 쇠, 폰>이 되는 건 아닐까 상상해 봤다. 노동개악이며 양대 지침 강행 따위로 숨 가쁘게 몰아치는 지금의 속도전에 한숨도, 함성도 곳곳에 크다. 스마트폰 화면 속 뉴스 창엔 이게 다 기득권 노조 탓이라는 독설이 가득하다. 독서가 때론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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