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지하철이 멈춰 섰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암흑의 지하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지하철을 다급하게 벗어난다. 고층빌딩 엘리베이터마다 몇 시간째 갇힌 사람들이 기약 없는 구조를 기다린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불 꺼진 맨해튼을 뒤로한 채 마치 피난민처럼 브루클린교를 건넌다. 2003년 8월14일 오후 4시 전기가 사라진 뉴욕시 모습이다.

세계 최고 문명국인 미국에서 역사상 최악의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전기가 사라진 거리에서 문명을 구가하던 인간의 일상은 사라졌다. 이날 정전사태로 뉴욕·뉴저지를 포함한 미국 동북부 지역, 미시간·오하이오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 캐나다 온타리오주 등 미국 7개 주와 캐나다 1개 주가 암흑천지로 변했다. 10곳 이상의 공항이 폐쇄됐고, 10곳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을 멈췄다. 피해 주민은 5천만명에 달했다.

1개 발전소 가동중단으로 수요가 다른 발전소에 가중되고, 이에 따라 과부하가 걸린 특정 송전선로가 차단되면서 연쇄적인 공급중단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 표면적인 원인은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져 봐야 한다. 전기는 인간이 발견한 물리학 법칙이고 곧 자연 법칙이다. 민영화와 자유화 이후 ‘돈’이 지배하는 전력공급체계는 복잡한 거래방식을 만들어 냈다. 물리 법칙이 작동되는 안정적인 전력시스템 운영보다는 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요구들을 가중시켰다. 여기에 더해 최대한 투자를 줄이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작동되면서 기존 시스템 안정을 위한 설비투자와 유지보수를 등한시하게 됐다. 결국 이윤을 최대 가치로 내세운 민영화와 자유화·규제완화가 전력시스템 불안정성을 높여 대규모 정전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블랙아웃으로 일컬어지는 대규모 정전사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캐나다 동부지방 정전 발생 2주 후에는 전력민영화와 경쟁체제를 주도했던 영국의 심장부 런던에서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송전선로 노후화 탓으로 돌렸지만 이 또한 민영화 이후 설비투자를 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비극이다. 2006년에는 유럽 전역 주택의 10%가 38분 동안 전기를 공급받지 못했다. 같은해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3시간 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2005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와 호주 동남부에서, 2003년에는 이탈리아 전역과 스웨덴 남부 및 덴마크 동부 지역에서, 2011년에는 칠레 등에서 대규모 정전사태가 일어났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정전사태는 이제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력자유화를 시행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점차 일상화되는 추세다.

대개 정전의 원인을 ‘설비 이상’으로 인한 연쇄파급으로 결론짓지만 미국 정전사태를 살펴보면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 번째는 민영화 이후 설비투자가 부족한 데다, 유지보수 비용까지 줄였다는 것이다.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적 자본의 속성상 투자 효율 극대화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유지보수 또한 마찬가지다. 민영화되면서 대부분의 전력회사들이 유지보수 업무를 아웃소싱하거나 인력을 최소화했다. 이로 인해 설비고장, 설비 노후화가 잇따르면서 정전사태로 번진 것이다.

두 번째는 복잡한 전력거래가 전력시스템 안전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미 사태처럼 국가 간, 주(州) 간 대규모 전력거래가 장거리 송전 및 송전선로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2003년 이탈리아 대정전 또한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공급되는 송전선 문제로 발생했다. 국가 간 대규모 전력거래와 이를 제어하는 시스템 부재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소개할 때 자세히 밝히겠지만, 여타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07년 제주 전역에 발생한 정전사태 당시 1시간이면 충분한 복구시간이 4시간이나 걸렸다. 2011년 전국적인 순환대정전도 전력시스템 운영주체인 전력거래소와 각 발전소, 한전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발전소와 송전선로·변전소 등 전력시스템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2001년 한전 발전부문을 분할하고 민간발전사를 확대해 발전 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비롯된 정보 비대칭을 포함한 전력시스템 컨트롤타워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한전의 배전분할 중단 이후 전력산업 재통합을 꾸준히 요구해 온 전력노동자들이 지적한 문제점이 대규모 정전사태로 현실화한 셈이다.

전기는 현대 문명사회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서비스다. 인간의 생활뿐만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생존의 문제다. 대규모 정전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전력민영화는 인간의 삶을 멈추게 하고 심할 경우에는 생존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줬다. 인류 생존과 지속가능한 삶의 첫걸음은 시장경쟁 효율을 가장한 민영화와 자본의 탐욕을 멈추는 것이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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