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지난 11일 오후 연합뉴스는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 내일 최종서명 … 8년 만에 타결>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당일 오후 5시 반 부랴부랴 ‘삼성직업병 타결 뉴스는 오보입니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렸다. 반올림은 “삼성반도체 교섭(조정) 의제가 사과·보상·재발방지대책 세 가지인데, 12일 합의가 예정된 부분은 재발방지대책뿐이고 남은 두 의제 사과·보상은 아무 진전이 없다”고 밝혔다. 특히 반올림은 “삼성이 자체 보상과 사과를 강행하며 남은 두 의제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반올림은 “삼성이 일방적·독자적으로 보상위원회를 구성해 조정위에서 사과·보상·재발방지대책을 함께 다루기로 한 약속을 스스로 저버렸다”며 “강남역 삼성전자 앞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반올림은 13일 오전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기자회견도 예고했다.

반올림의 이런 노력에도 12일 아침 거의 모든 언론이 ‘타결’이라고 보도했다. 12일 석간신문은 한술 더 떴다. 헤럴드경제는 <삼성 ‘반도체 백혈병’ 최종 타결>이란 제목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실었다. 이 기사는 ‘조정안 완전 합의 … 보상, 사과 이어 질병예방 활동’이란 작은 제목을 달아 ‘최종’과 ‘완전’을 강조했다. 반올림이 말한 ‘보상과 사과’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두 의제는 이미 합의했고 이번에 마지막 남은 ‘질병예방 활동(재발방지대책)’마저 합의한 것처럼 꾸몄다. 환장할 노릇이다.

문화일보는 8면을 모두 털어 반올림 합의 소식을 다루면서 <반올림 “예방대책만 합의 … 사과, 보상 남아”>라는 작은 기사로 반올림의 입장을 실었다. 문화일보는 적어도 사과와 보상 문제가 남았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화일보는 남은 두 의제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는 반올림을 향해 ‘떼쓰기’라고 몰아세웠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언론은 ‘확인사살’까지 나섰다. 머니투데이는 14일자 25면에 <진정성 있는 호소, 설득력 있는 추진 … 삼성반도체 질환 9년의 논란 끝맺다>는 제목으로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이 기사는 삼성과 가족·반올림 사이에서 3자 조율을 맡은 김지형 조정위원장(전 대법관)의 입을 빌렸다. 최종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났다고 못 박고 싶었나 보다.

지난해 7월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이 반올림과 삼성전자 사이에 새 갈등을 불러왔고, 그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는데도, 머니투데이는 개의치 않았다. 이 기사엔 “돈을 집행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삼성전자”와 “김 위원장의 추진력과 계속된 설득작업이 없었다면 최종합의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유가족 입장만 들어 있다. 이 기사엔 지하에 꽁꽁 숨어 있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난 수백 건의 죽음을 여론의 장으로 끌어내 지난 9년 동안 외롭게 싸웠던 반올림의 입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재계 주변을 맴돌면서 노동자들 싸움이 8~9부 능선을 넘으면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앞서 보도하는 언론의 못된 습성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평생 한을 안고 살아간다.

1994년 전지협·전기협 파업 때도 6월30일 이른바 ‘원로선언’ 직후 언론은 파업이 끝났다고 아우성쳤고, 결국 파업노동자들은 원로들을 동원한 거간꾼과 언론의 협잡에 무너졌다. 언론은 그 파업이 불과 일주일 전 경찰이 전국 14개 철도기관사 사무실에 먼저 공권력을 투입하는 바람에 떠밀려 일어났다는 기본조차 잊었다. 그때 연대파업으로 해고된 김연환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은 끝내 복직도 못한 채 정년을 맞았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도 이른바 ‘국회 환노위 합의대안’에 기대어 모든 게 해결됐다는 투로 보도한 한 신문의 조급함이 부산조선소 노동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

반올림은 거의 모든 언론이 상황 종료됐다는 바로 그곳, 삼성전자 앞에서 오늘도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혹한을 뚫고 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언론이 버린 사과와 보상이란 남은 두 의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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