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새해 들어 나라가 더 볼썽사나워졌다. 압권은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다.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1천만 서명운동'에 직접 나섰다. 국회를 무시한 건 물론이고 이해당사자 간 격렬한 충돌이 불가피한 뜨거운 쟁점을 중재하고 조율해야 할 국정 최고지도자가 어느 편의 손을 보란 듯이 들었다.

우리 사회 대표적 기득권집단인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사용자단체들이 주도한 서명운동에 대통령이 나서다니. 정말 최초 진기록 세우기 ‘덕후’ 아닌지 검증해 보고 싶다. 사전 교감을 자랑하듯이 선도적으로 삼성그룹 사장단이 줄줄이 서명운동에 나섰다. 이쯤 되면 박근혜 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자신이 대변해야 할 재벌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는 데 올인할 작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참 화끈하다.

시점도 대놓고 노골적이다. 대국민 담화를 통해 뜻밖에 노동 5법 중 파견법 개정을 가장 중요한 입법요구로 부각시킨 직후 대통령이 국회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대화와 타협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파견 확대는 전 국민 하청화와 비정규직화를 앞당기며 사회양극화를 역진불가 양상으로 고착화시키는 핵심 주범임이 밝혀졌음에도 재벌 자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민감한 쟁점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정몽구 보호법'으로 불리며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는 입법 사안으로 비판받아 온 파견 확대를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인 노동 3권을 보호해야 할 무거운 책무를 지닌 대통령이 부정하고 나서니 이러고도 영이 서길 바라는가.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관철하기 위해 새누리당이 지금 벌이고 있는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시정잡배가 따로 없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주도하고 합의한 법마저 꼼수로 뭉개고 대통령 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주구로 전락한 국회의원들 꼬락서니가 개차반이다. 마르크스가 설파한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도구’라는 단정이 지금의 박근혜 정부에서처럼 적절한 사례가 어디 없을까 싶다. 자신이 가장 기겁하고 손을 내저으며 싫어할 혁명가의 규정에 사로잡힌 꼴이다. 3권 분립이란 최소한의 근대국가 존립 원칙마저 짓밟고 부박한 정치적 행보 속에서 자본가 이익단체의 수장을 자임하는 대통령을 목도하면서 신유신독재란 우려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노동 5법과 2대 가이드라인은 노동개혁이 아니라 개악을 넘은 재앙이다. 절반 이상의 노동자가 절반 이하 임금과 전방위적 사회복지 차별을 감내하고 있다. 헌법이 무력화돼 2% 내외의 비정상적 노조 조직률에 저주처럼 갇힌 비정규직 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으로 경제규모로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진작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최대 선결과제가 사회양극화 해소인데, 이런 개악입법과 정책으로는 개선을 기대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강력한 노동조합이 인간다운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드는 핵심 지렛대인데, 노동 3권을 부정하고 유노조 사업장을 백안시하는 정부가 뭘 개선한다는 말인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노동조합을 만들라고 주장한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해야 될 일은 재벌자본 기득권 지키기가 아니라 헬조선으로 불리며 노동지옥이 돼 가고 있는 한반도 남단 국민의 삶의 질을 신장시키는 일이다.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 왜 그런 건 배우지 않는가.

재벌자본의 사회적·법적 책임을 묻는 참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및 복지정책, 경제민주화 정책을 시행하는 게 급선무이고 근본적인 대책이다. 비통한 심경으로 600만명이 동참한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운동을 외면한 대통령이 지금도 불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는 재벌 오너들을 위한 1천만 서명운동이라니 우스꽝스럽다. 지방공단 중소·영세업체들의 어려움이 개선될 방도를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지만 그걸 노동기본권을 희생시키고 사회통합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파견 확대로 한다는 건 자가당착이다. 원·하청 불공정거래만 제대로 시정하더라도 상당 정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대통령은 사용자단체 앞잡이가 돼선 안 된다. 사회적 약자들의 든든한 지지대가 돼야 마땅하다. 계속 이럴 거면 대통령 자리를 내놓고 전경련이나 경총에서 주는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게 차라리 온당하다.

결국 한국노총이 노사정 합의 파기를 선언한 마당에 대통령도 원점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기대난망이지만 대통령부터 정신 차리고 더 이상 비정상적 오버를 그만두길 바란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