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이 9·15 노사정 합의 파기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노정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9·15 노사정 합의가 4개월여 만에 파탄 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회적 대타협으로 명명된 '노사정 합의문'이 공식합의 다음날부터 의미를 잃어 갔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노동법 발의, 합의 하루 만에 '파열음'

지난해 9월14일 노사정 대표들이 진통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노사정위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는 다음날 노사정 합의문을 최종 조인했다. 하지만 최종 합의 다음날인 16일부터 파열음이 일었다.

새누리당이 이른바 노동 5대 입법을 전격 발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노사정 합의문에는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에 대해 “노사정은 관련 당사자를 참여시켜 공동실태조사, 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집중적으로 진행해 대안을 마련하고, 합의사항은 정기국회 법안 의결시 반영토록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노동 5대 법안에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 허용업무 확대 같은 노동계가 극구 반대했던 내용을 집어넣었다.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노동계가 반대하지 않았던 1년 미만 비정규직에 대한 퇴직금 지급이나 차별시정신청 대리권 허용 같은 내용은 법안에 없었다.

고용보험법 개정안(실업급여 지급요건 강화)과 근로기준법 개정안(연장근로 가산수당 축소)에도 노사정이 합의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됐다.

한국노총은 “노사정 합의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이에 새누리당과 정부는 “노사정 합의문대로 합의가 된 내용은 법안 의결시 반영하면 되기 때문에 합의 위반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노사정 대표가 협상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내용을 공식합의 하루 만에 개정안에 담아 내놓은 정부·여당의 행태는 파국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조급한 정부, 양대 지침 강행 '악수'까지

노동법안이 야당 반대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정부는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초부터 일반해고 가이드라인 제정과 취업규칙 변경지침 개정작업을 서둘렀다. 노사정 합의 직후 “지겹도록 노사정 논의를 하겠다”는 이기권 노동부 장관의 말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한국노총이 약속 파기로 판단할 만한 대목이다.

노동부는 지난달 8일 양대 지침에 대한 노사정 협의를 공식 요청한 지 사흘 만에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일반해고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이어 같은달 30일 전문가 간담회에서 사실상 정부 초안을 발표했다.

노동부는 “전문가의 검토의견 수준에 불과하고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현장에서는 정부 초안을 지침으로 받아들였다.

한국노총이 정부의 잇단 협의요청을 거절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도 “임시국회가 끝나는 1월8일 이후부터 논의하자”는 한국노총의 요구를 외면했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19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이런 사실을 언급하면서 “과정관리상 정부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봉합에 그친 합의문, 홍보만 신경 쓴 노사정위

노사정위도 정부 독주로 노사정 합의가 파기되기까지 제 역할을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사정위는 9·15 합의 직후부터 새누리당의 노동법안 발의, 정부의 양대 지침 강행 움직임으로 파국이 예상됐는데도 한국노총이 이달 11일 합의파탄 선언을 한 뒤에야 부랴부랴 중재에 나섰다.

지난달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의 그리스 경제사회위원회·국제노동기구(ILO) 방문을 앞두고 한국노총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노사정 합의가 정부·여당 때문에 파탄 나게 된 사실을 국제사회에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해 “사회적 대타협에도 입법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는 모호한 말로 일관했다.

노사정 합의 파국은 9·15 노사정 합의문에서 예견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노사와 충분히 협의를 거친다”는 내용의 양대 지침 관련 문구와 “합의사항은 정기국회 법안 의결시 반영토록 한다”는 비정규직 관련 합의문구 탓에 정부·여당의 일방독주가 예상된다는 우려가 많았다.

정부·여당이 '합의를 위한 합의'에 목맨 결과 한국노총의 합의 파기를 초래한 셈이다. 한국노총의 한 산별연맹 관계자는 “9·15 노사정 합의문 자체에 여러 위험성이 내포해 있었다”며 “정부·여당이 합의문조차 어겨 가며 악용한 끝에 지금의 상황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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