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장군은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를 얼마나 더 유지시킬지를 놓고 미국과 갈등하다 ‘2년 군정’에 합의하고 같은해 11월14일 미국으로 가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일종의 면접시험이었다.

돌아온 박정희 장군은 그해 12월 미국의 해외원조를 전담하던 대외원조처(유솜·USOM)의 킬렌 처장을 초청해 느닷없이 울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울산행에는 박 장군과 김용태 중앙정보부 고문, 당시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이병철 삼성그룹 사장도 동행했다. 박 장군은 눈 덮인 황량 벌판에 군데군데 말뚝을 박아 놓고 ‘울산’을 공업도시로 탈바꿈시키겠다고 밝혔다. 킬렌 처장은 터무니없다고 비난했다.

박 장군 일행은 그날 저녁 자동차로 경주로 와 불국사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 밤 박정희 군정의 경제계획을 놓고 불국사호텔에서는 한미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킬렌 처장과 김용태는 설전을 주고받았다. 성질 급한 김용태는 킬렌의 멱살을 쥐었고 킬렌도 벌떡 일어나 김용태의 손목을 잡았다. 군정은 며칠 뒤 62년 1월 연평균 성장률을 7.1%로 정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군정은 같은해 2월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을 시작으로 울산 개발에 나섰다.

애초 군정은 첫 공업단지로 여러 곳을 염두에 뒀다. 마지막까지 울산과 경합했던 곳은 낙동강 하류의 ‘물금’이었다. 지금 경남 양산시 물금면이다. 낙동강 물줄기로 보면 물금은 부산과 김해 바로 위다. 울산을 제치고 물금이 공업단지가 됐더라면 부산과 김해·양산 등 낙동강 하류 전체가 오염됐을 것이다.

조수간만 차이가 1미터도 채 안 돼 상선 접안조건이 좋은 게 울산을 택한 이유였다. 사실 울산공업단지는 관련 입법도 없이 우선 땅부터 파고 시작했다. 공업단지법 제정 이후 첫 국가산업단지는 구로공단(지금의 구로디지털단지)이 최초다.

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구로공단 조성도 울산처럼 ‘빨리빨리’ 정신에 입각한 밀어붙이기였다. 박정희 정부는 61년 9월 논밭이었던 구로동 일대 약 30만평의 농지를 강제로 빼앗았다. 하루아침에 경작지를 잃은 소작민들은 실업자가 됐고, 땅 주인들도 황망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에 땅 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에 들어갔고, 법원은 66년 주민들 손을 들어줬다.

보상을 기다리던 주민들 앞에 박정희 정부는 색다른 해결책을 내놨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땅을 돌려주는 대신 68년부터 소송을 제기한 농민과 관련 공무원까지 잡아들였다. 불법연행과 가혹행위 끝에 143명은 땅 권리를 포기했고 끝까지 버틴 41명은 재판에 넘겨져 그 가운데 26명이 ‘소송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 7월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재심을 권고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26명 중 23명은 형사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대법원은 최근 두 번의 재심 끝에 다시 한 번 땅 주인들 손을 들어줬다. 농지를 강탈당한 농민들로선 50년 만의 최종 승소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 서울남부지검은 소송을 제기한 주민 중 ‘가짜 피해자’도 있다며 재수사에 들어갔다. 피해자로 분류된 이들 가운데 68~70년 검찰과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숨진 사람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 검찰은 참 이상한 쪽으론 끈질기다. 박근혜 정부 들어 권력형 비리 수사에 그토록 무능했던 검찰이 구로동 땅을 강탈당한 주민들에겐 참으로 끈질긴 수사 근성을 발휘하고 있다.

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가짜 피해자를 색출하겠다는 검찰에게 묻고 싶다. 검찰과 중앙정보부의 고문이 일어난 68년 이전에 죽은 땅 주인이 있다 한들 국가가 61년에 땅을 강제로 빼앗은 사실이 없어지는가. 명색이 사법기관인 검찰이 땅 뺏긴 피해자들을 잡아다 고문해 놓고 사과라도 했던가.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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