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올해는 정부가 불통과 강행의 마이웨이로 일관한 한 해였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무차별 탄압으로 표적 구속하더니, 노동계가 격렬하게 반대하는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일방변경 지침 정부안을 어용학자들을 앞세워 보란 듯이 발표했다. 한겨울 동투가 국회 앞에서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세밑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어처구니없는 합의까지 목도하게 되니, 이 정부는 정녕 국민을 맞상대로 싸우는 걸 즐기는 모양이다.

이런 무도한 정부에 맞서 결기 있게 맞서 싸울 노동운동의 허약한 현주소가 안타깝다. 한국노총은 9·15 노사정 합의에 참여하면서 사실상 투항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들인데 왜 노동운동은 지금도 이렇게 홀대받으며 감옥행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나. 헌법에 정한 노동 3권조차 무력화된 현실 앞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하나 싶어 비감해진다.

30일 민주노총 서울본부 전 사무처장이었던 박상윤 동지의 11주기 추도식에 다녀왔다. 세월이 흐르니 금방 차오르던 눈물도 많이 말라 버렸다. 11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비보를 전해 들은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오히려 전화위복이라며 너끈히 역경을 헤쳐 나와 끈질기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깔깔대며 좋아라 할 녀석이 먼저 세상을 버리다니 처참하고 아득했다. 오만 표정과 손짓 발짓으로 동지든 친구든 술집 사장님이든 심지어 정보과 형사나 길 가는 행인까지 붙들고 막역하게 얘기하던 활동가, 사람 만나면 생년월일 생시까지 따져 위아래 위계를 정할 정도로 요란한 친화력을 갖춘 천생 조직가인 박상윤 동지는 민주노총에서 제일 오지랖이 넓은 놈이었다. 용역깡패 앞에서 손가락을 갈고리로 만들어 두 눈을 찌르겠다고 장난 아니게 위협하던 그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끝까지 책임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투사였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지만 노동운동 원칙을 일상에서 실천한 드문 간부였다. 새로운 민주노조운동의 주체가 생성되던 시기 박상윤 동지는 핵심 활동가로서 자기 본분을 다했다.

결국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건 평상시에 준비된 조직력이다. 단결의 이음매가 강고할수록 투쟁 승리 가능성이 높고 패배하더라도 의미 있는 교훈을 남긴다. 그래서 조직된 조합원의 쪽수만큼 간부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략과 원칙, 세심한 전술이 없는 노조운동은 조직확대도 어려울뿐더러 현장에서 힘을 가지기 쉽지 않다. 박상윤 같은 활동가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양성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이 정권과 자본의 칼바람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박상윤 동지는 책임 있게 투쟁 전술을 논의했고 반드시 마무리까지 함께 헌신했다. 덤프연대와 학습지 재능교육, 방송사 비정규직노조,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상용직노조, 서울일반노조, 이랜드노조 등 당시 굵직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빠짐없이 결합해 헌신했다. 그는 투사였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조직가였다. 밤을 낮 삼아 조직화 사업이라면 사활을 걸었다. 그는 투쟁전술을 지도하고 조직화 사업을 성과 있게 끝맺을 줄 아는 배포와 실력을 겸비한 활동가였다.

박근혜 정부의 무차별 반노동 정책이 가져올 암울한 현실이 우려되는 만큼 정권과 자본의 공세를 막아 내고 새로운 대안을 실현할 노동운동의 실력에 대해서도 걱정이 만만찮다. 이젠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얘기하는 것조차 식상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인 게 분명한데 참 무력하다. 현장의 아우성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노동조합 바깥의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이 차별받고 고통받는 현장에서 함께 뒹굴며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박상윤 동지가 남긴 유지대로.

박상윤 동지는 맑고 아름다운 운동을 꿈꿨지만 꽃피워 보지 못한 채 생을 접었고, 그 몫은 살아남은 우리의 어깨에 짐지워졌다. 정부의 노동개악을 노동자들의 단결투쟁으로 막는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노동운동 혁신을 현장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만들어 나갈 활동가들이 제 몫을 다할 때 비로소 활로는 열릴 것이다. 노동운동이 제 역할을 못하면 이 사회 전체가 불평등의 지옥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평균적 수준의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서라도 노동운동의 재기와 사회적 역할 강화는 필수요건이다. 노동자들이 올 한 해 겪은 고통이 내년에 노동운동 도약의 밑거름이 되길 기원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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