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선아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용역업체 변경 과정에서 집단해고를 당하거나 일부 근로자들만 고용승계가 부정되는 것은 연중에도 상시 발생하는 문제지만, 특히 연말에 많이 발생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집단해고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고, 연례행사처럼 수년째 유사한 내용들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새로운 하청업체로의 고용승계가 부정된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상담을 하게 됐다. 다른 노동자 대부분은 고용승계됐는데 자신들만 고용승계가 거부될 이유가 없었고, 수년간 일한 직장에서 사내하청 소속 근로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해고되는 것이 왜 가능한 것인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그들이 원하는 속 시원한 법적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차라리 징계해고나 정리해고는 나름의 엄격한 요건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법적 구제가 가능한 경우가 상당수 있으나, 계약기간 만료나 고용승계 거절을 통한 근로계약 체결 거부는 법적구제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이용해 원·하청 사용자들은 도급계약 만료와 용역업체 변경 절차 과정에서 맘에 안 드는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해고하고, 인력규모를 축소하는 정리해고 역시 매우 손쉽게 해결하고 있다. 엄격한 법적절차나 정당한 이유를 요구하는 징계해고나 정리해고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기간제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행 법·제도를 기반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는 위와 같은 법률상담에서 긍정적인 상담 결과를 말씀드리지 못하는 사안도 종종 존재한다. 어떤 노동자들은 이러한 결과에 분노하고 억울해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기도 한다. 특히 주변에서 하청노동자들이 1년 단위로 해고되고, 고용승계가 거부되고, 기간제라는 이유로 단기계약 종료 후 해고되는 사안들과 그러한 사례가 구제되지 못하는 것을 종종 봐 온 경우 그 수긍과 체념이 더욱 빠르다. 사내하청 등의 간접고용제도로 인해 비정규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있음에도 집단해고가 일상화되고, 이에 대한 법률적 구제가 쉽지 않은 현실이 장기화하면서 이에 대한 수긍과 체념을 반복학습하며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방송된 JTBC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역을 맡은 배우가 노동자들 교육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2002년 신규채용 70%가 비정규직이오. 그럼 이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되느냐? 4년이 지나도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9%가 안 돼. 미국 파견노동자는 1년이 지나면 57%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데…. 이게 무슨 소리예요, 이게 무슨 소리냐구. 한국에서 취업하는 사람은 대부분은 평생 일을 해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거잖아. 이게 몇 해 이러다 말게 아니에요. 97년 IMF가 터지고, 나라 살린다고 금 갖다 바치고, 회사 살린다고 줄줄이 사직서 쓰고 나갈 때 파견 허용되고, 정리해고 시행되고 난리 쳐도, 경기 좋아지면 예전처럼 돌아갈 줄 알았죠? 가장 혼자 벌어서 네 식구 그럭저럭 먹고살고 애기들 키우고 하던 그런 시절 그런 세월은 다시는 안 와요. 꼭지만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마음대로 갖다 쓰다가 아무 데나 갖다 버릴 수 있는 이 좋은 세상을 어느 미친놈이 바꾸고 싶겠느냐고. 2년만 더 지나 봐요,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기억도 못할 거예요.”

현재 정부는 경제위기니 비상사태니 하는 단어를 남발하며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내용의 노동법 개정을 강행하려 하고, 저성과자 일반해고 지침을 추진하려 한다. ‘저성과자 일반해고제도’가 도입된다면 성과평가 등을 통해 손쉽게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게 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징계해고나 정리해고 절차를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본 바와 같이 기간제 노동자들이나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는 이미 근로기준법 제23조나 24조에 따른 해고규정들이 실질적으로 거의 적용되지 않고 형해화된 상황인데, 정부는 비정규직 규모를 더욱 확대하는 법안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만일 정부의 이와 같은 목적이 달성돼 기간제 근로자들의 기간만료 해지와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거절 및 통상근로자들의 저성과자 일반해고(평가해고)가 만연하게 된다면, 어쩌면 몇 년 뒤에는 집단해고가 일상화돼 버린 2015년 현재조차도 그나마 ‘해고가 쉽지 않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기억도 못할 것’이라는 드라마 속 대사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이유다.

부디 필자의 이런 상상이나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하길 간절히 바란다. 참고로 위 상담사안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에 쉽게 수긍하거나 체념하려 들지 않았다. 현재도 투쟁 중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