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고 드라마 <송곳>의 구고신은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 다수의 가난한 자들은 왜 부자를 위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할까. 노동자들이 왜 노동운동하는 노동자들을 이해하지 못할까. 그 원인은 개인의 허위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우리 현대사가 낳은 레드 콤플렉스에 크게 기인한다.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면 '좌익용공'이 돼 공권력에 의해 처벌받고, 공동체 내에서 권리와 분배를 강하게 주장하면 '빨갱이'가 돼 왕따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표현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자기검열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보수주의 위정자들이 외치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자본가·기업가들의 자유일 뿐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다. 헌법 제23조 표현의 자유 주체가 노동자가 되면 그것은 반사회적 국가 전복행위가 되고, 경제민주화라고 하는 실질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헌법 제33조 노동 3권은 그 주체를 분명히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면 그자는 사내에서 ‘송곳’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국가 성장을 가로막는 이기적 분열종자가 된다. 이러한 선동이 노동자에게도 내면화되는 것이다. 생물로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한국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고 자본가의 자유다. 노동자의 자유 확장은 자본가의 자유 축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유를 추구하면 자유민주주의 부정세력이나 친북좌파가 된다. 의심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믿게 된다. 단순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 중 반수 이상이 깨어 행동하지 않았거나, 존재를 배반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노동자 개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문제, 교육의 문제, 언론의 문제 등 구조적 원인으로 인해 여하간 우리는 그러한 상태이지 않은가.

노동·시민사회 운동계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켜 내지 못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기계적 중립 태세를 취함으로써 구체적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공권력에 내주게 된 점은 못내 분하고 아쉽지만 그걸로 끝이다. 서민·노동자들의 종착지는 결국 스스로 정치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다.

필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그런데 법률 쟁점에 대한 노동조합 간담회에서 주제 넘게도 두어 번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법은 흰 종이에 쓰여 있는 검은 자국에 불과합니다. 안 지키면 그뿐, 지키라고 관철시킬 힘이 없으면 그뿐입니다. 그렇다고 소송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잘나 봤자 한낱 인간일 뿐인 판사에게 신의 결정을 구해야 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법적 구제절차는 사회경제적 약자가 절실한 최후에 잡을 수 있는 줄이어야 한다. 힘센 자들은 정글에서 다른 수단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지배자들이 더 가지고 빼앗고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자주 이용한다. 법도 실질적으로는 서민·노동자들의 무기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헌법 전문에는 아직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그래서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한다”고. 앞 문장이 수단이고 뒷 문장이 목표다. 노동자들의 무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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