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트렌드를 총잡이가 총질하듯, 혹은 주방 아줌마가 설거지하듯 다루는 패션 잡지에서 17년 동안이나 일했다. 그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너무도 이골이 난 나머지 유행이라든가 트렌드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이 들었다. 처음엔 멀미가 났고 나중엔 참을 수 없는 역겨움마저 느껴졌다. 그러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둔 지 만 4년이 됐다.

그랬던 나도 결코 거부하지 못한 트렌드가 있다. 북유럽 스타일 혹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인테리어 리빙 트렌드. 2007년인가 2008년 무렵이었는데 ‘안목 높은 소수의 강남 아줌마들이 애장하는 가구’로 처음 주목받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비록 스칸디나비아 가구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너무도 비릿했지만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그 형태는 참으로 유혹이었다. 웬만한 월급쟁이는 엄두도 못 낼 만큼 고가이기에 가슴이 아플 정도로 좋았다. 게다가 당시 덴마크에서 수학했다는 디자이너 하지훈의 설명을 듣고 나니 애잔하게 사랑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 등의 북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겨울이 길잖아요. 그만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죠. 그러다 보니 실내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발달한 거예요. 오랜 시간 집에 머물러도 결코 질리지 않는 디자인 쪽으로요. 그만큼 가구나 인테리어에 공을 많이 들이는데 한 번 구입하면 대를 이어 쓰기 때문에 투자도 많이 하고 새로운 가구를 들일 때에는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할 정도로 심사숙고하는 게 모두들 몸에 배었다고 할까요?”

그게 핵심이다. 오래도록 지리멸렬한 삶을 고무시키는 질리지 않는 디자인. 당연히 이탈리아 디자인처럼 장식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유 없이 화려한 건 금방 질리니까. 하지만 나무결이 살아 있는 소박한 탁자나 의자는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조선시대 목공예품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북유럽 스타일은 우리 고유의 조선 미학과 어딘지 닮아 있다. 무엇보다 사용성에 따른 기능적인 간결함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그리고 아날로그적 손맛이 담긴 수공예적 가치를 높이 사는 그 본질이 닮았다.

그 때문일까. 북유럽 디자인이 우리의 일상이 된 느낌이다. 대세도 이런 대세가 없을 정도로 대중화됐다. 다행스러운 건 그 근간에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좋은 디자인을 누릴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대중화됐다는 거다. 1천만원대 의자에서부터 몇 천원짜리 천 쪼가리에도 북유럽, 혹은 스칸디나비아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달려 있는 상황이다. '트렌드를 좇지 않는다'는 북유럽의 디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디자인 업계를 수년째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7년 전 북유럽 디자이너가 만든 오리지널 빈티지 체어를 무려 100만원이나 주고 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의자는 내 삶을 결코 고무시키지 못했다. 은행 대출금 압박 속에서 야근을 계속하던 나날이었기에 그 우아한 안락의자에 엉덩이를 단 한 시간이라도 붙여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 의자를 팔았다. 헤어지는 남자 친구에게. 가차 없이.

그 이후 눈이 많이 오는 한적한 시골 생활을 시작한 3년째 되는 지금. 내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북유럽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단순히 구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서의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할까. 요즘은 집안을 온통 화이트로 페인트칠하고 거실등이나 화장실 거울, 협탁 등을 사이프러스 원목 판재를 잘라 리폼하느라 바쁘다. 인터넷에서 눈도장 찍어 둔 5만6천원짜리 ‘북유럽 방한 커튼’도 돈이 아까워 직접 만들어 보기 위해 원단 쇼핑몰을 기웃거릴 만큼 여유롭게 가난하다고 할까.

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밖에 나가서 소나무 가지랑 솔잎·솔방울을 주워 와야겠다. 간단하게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고 읍내 마트에서 4천800원 하는 와인도 두 병 사와야겠다. 냉동실에 넣어 둔 새우와 가자미, 훈제 연어로 조촐한 만찬을 준비해야지.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 그게 바로 북유럽이든 어디든 삶의 정수일 테니까.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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