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테 콜비츠,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 1943년, 브론즈, 독일역사박물관
▲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2년, 석판화, 뮌헨 사우어바인(Sauerwein)컬렉션
   
▲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여기 두 여성이 있다. 한 여성은 숄을 둘러쓴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그 여성의 어깨에 기댄 또 한 명의 여성은 마치 눈을 감고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비록 마주 본 채 대화를 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마음속으로 외치는 기도는 아마 같을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그가 제발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라고.

이 조각 작품은 독일의 판화가이자 조각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가 남긴 최후의 작품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이다. 전장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여성 두 명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와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가 함께 모여 걱정과 기다림으로 지쳐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두 여성을 묘사한 방식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봐서 ‘나이 차가 있는’ 후자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콜비츠는 말년에 왜 이다지도 어두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이 젊은 여인과 늙은 여인의 처지와 심정을 아주 처절하게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공감을 넘어 이들의 모습은 콜비츠와 다름 아니었다.

얼핏 봐도 ‘불행의 그림자’가 스치는 마지막 작품과는 다르게,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콜비츠는 ‘다 가진 사람’이었다. 자선병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는 착하고 뜻이 맞는 남편, 그리고 토끼 같이 귀여운 두 아들이 그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1913년에는 베를린 여성미술연합을 직접 설립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경력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 ‘행복감’은 콜비츠의 1910년 4월의 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내 생애에서 요즈음은 참 아름다운 날들이다. 살을 에는 듯한 큰 고통을 겪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혼자 설 수 있게 됐다. 벌써부터 나는 그들이 떠나가는 때를 그려 본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을 졸이지 않고도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충분히 다 자라서 자기 인생을 감당할 수 있게 됐고, 그리고 나 역시 내 삶을 꾸려 갈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고통으로 다가왔다. 부모 반대를 꺾고 둘째 아들 페터가 지원병으로 참전한 것이다. 그리고 임관한 지 한 달도 안 돼 콜비츠는 짧은 통지서를 받았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이때부터 행복감에 취한 ‘평범한 엄마’는 사라졌다. 대신 콜비츠는 ‘반전(反戰)예술을 하는 엄마’로 거듭났다. 주검으로 돌아온 페터를 보며 콜비츠는 깨달았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핏방울의 대가로 치러지는 일인가를.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을 누군가는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부터 콜비츠는 독일에서 날로 강고해져 가는 군국주의를 겨냥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1924년 8월 2~4일 라이프치히에서 중부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 청소년대회가 열렸을 때 포스터로 제작한 <전쟁은 이제 그만!>이 그 대표작이다. 이 포스터는 독일 거리 곳곳에 나붙어 반전운동 확산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우려했던 일은 터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나치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콜비츠는 이번에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야 했다. 그녀에겐 애지중지하는 손자가 있었다. 그 손자의 이름도 ‘페터’였다. 콜비츠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 한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죽은 동생의 이름을 붙여 줬던 것이다. 그런데 그 페터 역시, 채 성인이 되기 전에 제2차 세계대전 속으로 떠나 버렸고 결과 역시 같았다. 콜비츠는 ‘손자 페터’마저 1942년 9월22일 러시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두 번이나 죽은 가엾은 페터를 가슴에 묻은 콜비츠는 다시 슬픔을 딛고 분연히 일어섰다. 더 이상 우리의 ‘페터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이는 콜비츠의 마지막 석판화인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작품 속 어머니는 마치 암탉이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감싸듯 자식들을 자신의 품 안에서 보호하려는 몸짓을 하고 있다. 당시 콜비츠는 자신의 일기장에 단호한 어조로 기록했다.

“망아지처럼 바깥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이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그러나 나치 치하에서 반전운동은 곧 반역자로 몰릴 만큼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나치 정부는 이전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조국에 대한 배신을 부추기는 것과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에게도 박해가 닥쳐왔다. 예술아카데미에서 탈퇴하도록 강요당했고,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 수입을 잃었다. 작품들은 철거됐으며 전시회는 금지됐다. 비밀경찰의 협박과 심문은 물론이고, 공공연한 가택수색도 이어졌다. 이뿐 아니라 콜비츠는 51년 동안 콜비츠 가문이 살았던 베를린의 집에서 쫓겨나 노르트하우젠으로 강제이주까지 당해야 했다. 뼈아픈 사실은, 이때 남겨졌던 베를린 집이 공습으로 폭격당해 전소됐고 그로 인해 집에 있던 콜비츠의 판화작품과 인쇄화집들이 모조리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콜비츠는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을 제작한다. 그만큼 처절하고 간절했을 것이다. 콜비츠가 작품 속 젊은 여인의 모습일 때 그녀는 ‘병사 아들’을 기다렸고, 작품 속 늙은 여인의 모습일 때 콜비츠는 ‘병사 손자’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결과는 똑같이 ‘죽음’이었다. 작품 속 두 여인의 모습은, 어머니로서 그리고 할머니로서 사랑하는 아이를 둘이나 잃은 콜비츠의 자화상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경고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수많은 여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아프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마치 자신처럼.

콜비츠는 마지막 작품을 완성한 지 2년 후인 1945년 4월22일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전쟁이 끝나기 불과 2주일 전이었다. 아쉽게도 히틀러가 자살하는 것도, 나치 정권이 붕괴되는 것도 못 보고 콜비츠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작품은 세상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에게 애국주의 가면 뒤에 숨겨진 전쟁의 민낯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소리 없이 증명해 줬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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