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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박시백 화백] “시대 요구에 헌신한 자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

2015년 마무리를 앞둔 요즘 세월이 하 수상하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고시했다. 새누리당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 정국과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 중이다. 민주노총은 압수수색을 당했다. 한상균 위원장은 구속됐다. 지난달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은 백남기 농민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죄는커녕 공안광풍으로 맞받아친다. 흡사 유신 시절을 보는 듯하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럴 때는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가까운 조선시대는 어떤가. 성리학 이상을 품고 건국해서 중흥기를 맞았지만 어느새 이상은 사라지고 폐단만 남아 서서히 쇠망해 간 조선. 성리학과 양반의 지배질서 아래에서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에도 개혁의 기회는 있었으나 눈뜬장님이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시백(51·사진) 화백을 만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정사(正史)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권력투쟁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시대 의미까지 정확하게 짚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화백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96~2001년 한겨레신문에서 <한겨레 그림판(만평)>과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그렸다.

시사만화가에서 조선왕조실록 저자로

- 어떻게 시사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나.

“어릴 적부터 만화를 하고 싶어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습작을 했다. 고등학교에 와서 입시 준비하느라 멀어졌다. 그러다 대학 4학년 때인 87년 광주민중항쟁 관련 대자보만화를 교내에 붙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때 만화가를 해 볼까 생각했다.(하하) 당시 건국대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서 역할을 못 찾던 때였다.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신문에도 만평을 그렸다. 이후 기회가 닿지 않아 다른 일을 했는데, 한겨레신문에서 박재동 화백 후임자 채용공고를 냈다. 접수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박 화백은 한겨레신문뿐 아니라 <출판저널> <우리교육> <민족21> <함께걸음> <홀트> 등 다수 매체에 만평과 스토리만화를 그렸다. 대개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 잘나가던 시사만화 작가였는데 갑자기 신문사를 그만두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집필했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98~99년 <박시백의 그림세상>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던 때였다. 그런데 살짝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계속 (작품 수준을) 끌어올려야 독자들의 눈도 유지된다. 이대로라면 독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겠구나, 에너지가 떨어지기 전에 평생 그릴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조선왕조실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천893권 888책이다. 한글로 번역하면 320쪽짜리 413권 분량이다. 박 화백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1년간 조선왕조실록 공부와 현장답사, 작품 구상에 몰두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01~2013년 12년에 걸쳐 20권으로 세상에 나왔다. 1년에 2권씩 출판한 셈이다.

시대 요구에 정치가는 부응했는가

- 조선정치사에 주목했는데.

“시사만화도 정치이야기가 핵심이다. 그전부터 <삼국지> <초한지> 등 정치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백태가 늘 재밌었다. 조선사 역시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이기에 재밌더라. 무엇보다 조선왕조실록이 존재하지 않나.”

- 작품 이력을 보면 정치사를 다루는 게 좀 생소하다.

“정치사라는 게 권력투쟁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정치가들은 백성의 삶에서 권력투쟁의 명분을 찾았다. 사대부 지배질서하에서 민중은 의외로 수동적으로 살았다. 이럴 때 민중사라는 게 모호하다. 역사를 서술·평가하는 것이 엘리트 중심일 수 있다. 하지만 엘리트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게 있다. 사심을 버리고 정면으로 승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요구를 무시한 사람도 있다.”

흔히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한다. 승리한 자들은 사심을 가진 자들일 확률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왕이 죽으면 그 다음 집권세력이 서술한다.

“사심을 가진 사람이 승리한 역사, 그들 위주로 서술될 가능성이 있다. 시대 요구에 부응한 사람이 반역자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승리했건 실패했건 그렇게 했다고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런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시대의 요구 앞에서 헌신했던 사람과 사리사욕을 앞세운 사람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후손의 의무다. 현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알아 주지 않는다면 역사가 나를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들의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

- 가장 어려웠거나 매력적이었던 작품 혹은 인물을 꼽는다면.

“세종실록이 가장 어려웠다. 세종은 워낙 한 일이 많아서 공부할 양이 방대했다. 반면 철종실록은 너무 짧았다. 재위기간이 길지도 않았지만 부실 그 자체였다. 다른 실록의 하루치 기록이 철종실록에서는 한 달치 기록일 정도다. 안동김씨 세도정치 폐단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인물로는 정도전에게 매력적으로 접근했고 묘사도 그렇게 했다. 세종은 처음엔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공부하고 나서 역시 세종이구나 여겼다. 정말 대단하고 매력적이다. 뒤로 가서는 율곡 이이와 최명길이 좋았다. 조선 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그랬다. 역사 앞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시대 요구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사람들이다.”

백성과 나라를 우선한 율곡 이이와 최명길

박 화백은 율곡 이이에 대해서는 학자보다는 정치가로서의 매력에 주목했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화파였던 최명길은 "난국을 헤쳐 가는 진정한 정치가"로 평가했다.

“이이는 (임진왜란 전) 어지러운 시대를 제대로 진단하고 근본적 개혁을 20대부터 죽는 날까지 정파의 치우침 없이 주장한 사람이다. 왕을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근본적인 개혁인 경장(更張)을 주장했다. 해도 해도 안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그는 죽는 날까지 ‘나라의 병이 깊어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일관되게 역설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병자호란을 둘러싼 척화파와 주화파 대립을 다루면서 척화파에 무게를 둔다. 주화파는 오랑캐와 손잡은 배신자로 본다. 그런데 주화파인 최명길은 제대로 된 정치가가 그런 난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제대로 된 정세인식에다 위험을 넘나드는 청과의 협상까지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고 수행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우선했다.”

- 작품을 보면 이런 느낌을 받는다. 대체로 세자 때까지는 훌륭한 자질을 보이지만 왕이 되면 뜻을 펼치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감하고 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나.

“조선이란 국가의 정체성이 개혁을 싫어한다. 옛 법으로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도 옛 법을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성리학적 요구에서 나오는 당연한 주장이다.

왕들은 왕만의 정권이 아닌 사대부와의 공동정권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한다. 사대부가 싫어할 일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조가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개혁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이었다. 양반은 여전히 군역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숙종 때부터 무려 50년간 논의한 것을 그 정도로 끝내 버린 것이다.”

박 화백은 그럼에도 군주의 ‘개혁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모든 양인이 과거를 볼 수 있었다. 벼슬이 끊기면 더 이상 양반이 아니었다. 그때는 양반이 군역을 졌다. 궁궐 호위는 양반 자제에게 맡겼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양반이 급속히 불어났다. 양반들은 서원으로 들어가 군역을 피했다.

점점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숙종조가 되면 과거제가 무늬만 남는다. 영호남 사람은 장원급제를 해도 벼슬을 얻지 못했다. 서울 세도가가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성의 삶은 임계점에 달했음에도 근본적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한 방에 해결했다. 영·정조는 대원군처럼 할 수 없었을까. 당파 때문에 힘들었다고 해도 결국 개혁의지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 조선 후기와 닮아

- 박 화백이 볼 때 현대사와 비교할 만한 시대는 언제인가.

“이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모습이 조선 초기와 많이 닮았다고 봤다. 당시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했다. 건국 초기에 주는 역동성과 진취성을 많이 간직했다. 요새는 조선 후기와 많이 닮은 것 같다. 신분제와 제도의 문란이 너무 빠른 시기에 고인 물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 사회양극화나 노동문제는 정말 조선 후기를 빼닮았다.”

- 조선시대 개혁의 적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힘 있는 자가 자기 힘을 강화시킨다. 양반과 공신세력이 그랬다. 조선 중기 이후 대토지 소유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백성들은 소작농으로 떨어졌다. 그때 율곡 이이가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율곡은 이미 대동법을 주장했다. 성종 이후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면서 군사훈련을 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고 봤다. 제대로 국방을 세우자고 했다. 이때 제대로 개혁을 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임진왜란을 맞은 것이다.”

-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우리 시대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누구의 실록이 아니라 나의 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본적인 텍스트를 가져다 쓰지만 철저히 나의 시각에서 편집한다. 실록의 팩트를 기반으로 하되 나의 주관이 들어간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설득력 있는 기록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이다. 동일한 사안을 100명이 본다면 100개의 관점이 나와야 한다. 한 사람이 주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라?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이데올로기 문제다. 좀 더 나아가면 파시즘에 이른다. 요새 일제강점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중일전쟁 뒤 파시즘 사회를 보면 유신 때와 흡사하다. 최근 들어 그중 많은 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 같다.”

일제통치·독재정권 물리친 자랑스러운 역사

- 대한민국 역사는 어떻게 기록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역사에 대한 자학사관을 버려야 한다. 어머어마한 일제통치와 무시무시한 독재정권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 민중이 일어나서 민주화투쟁까지 승리를 일군 나라 아닌가. 잿더미에서 경제를 일으키고 노동자들의 땀과 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 내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 최근 구상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일제강점기에 대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5~7권 분량을 예상한다. 일제강점기는 역사를 기억해야 할 후손의 의무로서 시작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돼 있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얼마 전 영화 <암살>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 같은 굵직한 인물이 나왔는데, 그제서야 알려지는 정도다. 독립운동가 하면 김구·안중근·유관순·윤봉길 정도로 인식된다. 친일파는 이완용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같은 만주군관 인물들도 모른다. 나머지 숱한 친일파는 이완용 그늘에서 행복해한다. 모두 다 소개하면 재미없을 수 있으니 짜증 나지 않을 정도의 범위에서 많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소개하고 싶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의 해석이 개입됐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수많은 연구들을 잘 요약해서 보기 좋게 전달하려고 한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연윤정  yjyon@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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