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중턱 햇볕 귀한 언덕길에 비석이 세 개 있다. 누군가의 이름과 사연을 새긴 돌이 비바람과 시간을 견뎠다. 추모비라고 불렸다. 2000년 겨울, 미시령 옛길을 넘어가던 버스가 뒤집혔고, 까마득한 벼랑 앞에 겨우 멈췄다. 수십 명이 버스에 올랐지만 제 발로 내린 이가 적었다. 일곱이 죽었고 여럿이 피 흘렸다. 참사라고 뉴스는 전했다. 브레이크 고장 때문이었다고 경찰이 말했다. 각종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당시에 높았다. 총학생회의 이면계약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철들지 않겠다던 불패의 애국청년들은 기성의 폐습을 곧잘 따랐다. 낮은 비용은 안전점검 부실한 지입버스가 떠안았다. 늙은 어머니들이 봄 가까운 겨울이면 그곳을 찾아 섧게 울었다. 차디찬 돌덩이를 마냥 오래 품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어린아이를 품고 찾아 향을 피웠고, 재학생들은 안전한 행사 준비를 다짐했다. 마우나 리조트 붕괴 참사 소식을, 또 끊이질 않던 어딘가의 사고 소식을 나누면서 함께 울었고, 분노했다. 유리 상자 속 오래된 사진과 날적이에 곰팡이 잔뜩 슬어 태워 없애면서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아랫자리, 어느 날 비석 하나가 늘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교사를 추모하는 글이 선명했다. 오래전 자식 앞세운 늙은 어머니들이 그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섰다. 눈가 굵은 주름에 물이 고여 반짝거렸다. 슥 닦고 오르면 거기 또 추모비 앞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보며 잠시 웃었지만, 눈물 금방 흥건했다. 죽음도, 눈물도 끊이질 않았다. 노란 옷 입은 부모들이 여전히 길에 섰다. 진상규명이 먼 길이다. 밝혀진 바 없으니 의문사다. 저기 언덕 왼편에 또 다른 작은 비석 하나, 군부독재정권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군에 강제로 끌려간 뒤 죽은 어떤이의 이름 석 자를 기리고 있다. 여태 진상을 몰라 그저 의문사로 불렸다. 그 자리 놀이터 삼은 아이 셋이 비에 젖은 나무 난간 위를 위태로이 누볐다. “어차피 죽는 거 빨리 죽자”면서 뛰어내렸다. 위험을 경쟁했다. 머뭇거리는 친구를 독촉했다. 퉁퉁 불어터진 컵라면 버려두고 산길을 내달렸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털북숭이 강아지가 목줄에 질질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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