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사회학이 다루는 분석주제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사회구조와 행위, 그리고 의식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특히 구조-의식-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전사회학자들부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구조는 신분·계급·계층 등 다양한 개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기능주의 이론가들과 베버주의자들은 다원화된 계층구조에 관심을 쏟았다. 비판주의 이론가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이원화된 계급구조를 중심으로 사회구조를 분석하려 했다고들 한다.

어떤 개념을 선호하든 중요한 것은 구조와 의식이라는 것이 상호 별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구조가 의식을 규정하는 양상을 강조했지만, 베버는 거꾸로 의식이 구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구조결정론에 빠지는 것을 비판하며, 구조와 의식 양자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우연에 의해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다는 멋진 논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지금 한국의 노동조합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노동조합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우려스럽게도 포괄적 사회계급중심적 운동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계층지향적 실천에 빠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실천을 뒷받침하는 의식은 물질주의적 보상지향성 측면이 높고, 이는 탈물질주의적 사회평등지향성과 대조를 이룬다. 기업별노조의 제도적 기반하에서 제조업과 공공부문의 지불능력과 고용안정을 갖춘 부문에 포진한 노동조합이 주로 그러하다.

서구 노동운동사를 보면 노동조합은 끊임없이 계급운동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려 했고, 자본소유자가 아닌 노동력 판매자로서 자신들의 공동의 이해기반을 직시하고 그러한 위치에 있는 이들 간의 평등과 연대를 굳건히 하고자 했다. 그러한 결과 노동운동은 사회질서와 운영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불평등을 향한 자본의 욕망을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지금의 모습을 살펴보면, 사뭇 다르다. 주변부 노동시장이 이렇게 확대돼 가고 있고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되고 있음에도 노조의 힘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무관심한 건 아닐까 싶은 야속한 생각도 든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의 개념은 분명 상대적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무리 장시간 노동을 한다고 해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상대적 고임금과 고기업복지에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불만이 있으면 노조를 통해 문제제기를 하며 사측을 견재할 수 있는 일자리에 있는 이들을 이 시대에 누가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두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장시간 노동이 자신들의 집단적 직무통제력을 기초로 하여, 물질주의적 보상 극대화 지향성을 추구하는 의식의 발로라면, 노동시간이 길다는 것에 대한 연민도 그다지 생길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장시간 노동이 신규인력의 내부노동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기능까지 한다면, 이는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회학에서는 의식과 행위의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설명하려 할 때 적어도 그것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도덕성 문제로 쉽게 환원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분명 그것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일정한 구조적 내지 환경적 영향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반드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황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을 찾아내기 위한 사고실험을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라고 칭한다.

지금 한국 노동조합의 계층화가 우려스럽다면, 왜 그런지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면밀히 진단할 문제다. 즉자적 비난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한 진단을 통해 쓰라리더라도 구조-의식-행위의 메커니즘을 과감히 들춰 보고 치유해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동조합은 내부적으로 서로 강하게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고 필요한 연구와 분석작업에도 발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와 자본이 잘하고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다만 노조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국가와 자본의 시도에 맞설 때 그것은 모두 사회라고 하는 관객과 잠재적 조합원들 앞에서의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그 무대 위로 동원시키고 자신의 편에 등 뒤 후원군으로 포진시켜 낼 것인지를 깊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아예 관객들이 무대 위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떠나고 있지 않은지, 표를 사서 객석에 입장해 있을 여력조차 없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노조운동이라는 호사는 극장 안 계층들의 별세계로 간주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헤아려 봐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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