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미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비젼)

“2015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얼마일까요?”

“5천580원이요.”

“그래요. 그럼, 다가오는 2016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얼마일까요?” 이번에는 잠깐 주춤한다. 그러다 한두 아이가 손을 든다.

“6천30원이요.” "딩동댕."

며칠 전 신림동 A고등학교 2학년 노동인권수업 한 장면이다. 나는 최저임금의 개념을 설명한 뒤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예를 들어 내가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는데, 마침 집에서 가깝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고, 분위기도 좋고, 일도 편하다고 소문난 카페에서 구인광고가 났어요. 그래서 면접을 보러 갔더니 그 카페 사장님이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요즘 가게가 어려우니 시간당 5천원만 받고 일해 달래요. 못하겠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대요. 잠시 생각한 나는 하겠다고 대답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하루 5시간씩 이틀 즉, 10시간을 일하고 내가 받아야 할 임금은 얼마일까요?”

계산하는 아이, 웅성거리는 아이, 그렇게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역시나 이곳에서도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아이들이 대답하는 것은 “5만원이요”다. “땡!” 몇 번의 기회를 더 주고 나는 다시 설명했다. “당사자가 합의했어도 최저임금에 미달하게 약속했다면 그 부분은 무효로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시간당 5천원 받기로 한 부분은 무효!, 시간당 5천580원 받기로 한 것으로 봐서 10시간을 일했으면 55천800원을 받는 게 맞는 거지요.”

아이들은 이 설명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늘 약속을 잘 지키라는 이야기만 듣고 자란 아이들에게 당사자 간 약속보다 우선하는 게 있다는 개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법이 어떤 역사 속에서 탄생하게 됐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노동법은 당사자 간 자유의사에 따른 계약자유의 원칙만 앞세우다가는 현실적인 불평등만 양산하게 되더라는 역사적 교훈 속에서 시민법 원리를 수정하고 나오게 된 법이다.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힘없는 자를 최소한으로 보호할 기준을 정하고, 힘없는 자도 힘 있는 자와 대등할 수 있도록 약한자에게 무기를 주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 공익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탄생한 것이 노동법이다. 특히 노동자 두 명 이상이 술집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조차 불법이던 시절부터 피로써 일궈 온 것이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의 역사다. 이 역사를 찬찬히 이야기하고 노동법이 태동하게 된 원리를 말하기엔 내게 주어진 두 시간의 교육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르바이트를 해 봤거나 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면 네댓 명은 족히 손을 든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앞둔 학생들이 벌써 노동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 주는 최소한의 보호막 테두리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신들에게는 노동 3권이라는 무기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형식상 자유라는 이름의 얇은 옷만 걸치고 노동현장의 된서리를, 실질적인 불평등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노동’이라는 말부터 두텁게 색을 칠해 진실이 무엇인지 감춰 버린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말이다. 한국청소년정책원구원 조사 결과 일본이나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는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 노동인권에 대한 설명을 들었거나 교육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중고생은 16%에 불과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수준이 이렇다.

그나마 이 학교는 서울시노동권익센터를 통해 노동법교육을 의뢰했고, 앞으로 계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강당에 200명씩 모아 놓고 하는 한 시간짜리 대형강의 형태가 아니라 각반 교실마다 들어가는 두 시간짜리로 예정하고 있으니, 지금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이마저도 정말로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모자란 시간이다. ‘노동’에 덧씌워진 두꺼운 색을 지우고 ‘노동’의 의미를 전하기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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