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집회는 우리 시민의 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우려했던 어떤 폭력도 없었다. 집회는 축제처럼 진행됐다. 이제 정부가 시민 목소리에 응답할 차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을 가끔 본다. 고등학생으로 나오는 성덕선은 나와 한 살 터울이라 장면 하나하나가 지나온 삶의 흔적과 맞닿아 있어 재미있다. 가난하게 사는 덕선이가 활기 넘치는 학생인 것처럼 우리도 그랬던 것 같다.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일했던 누나의 한 달 월급은 13만원이었다. 가난했지만, 그때는 미래가 암울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기울어진 운동장도 아니었다. 지난주 방송된 응팔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들어간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떠올렸다.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가던 계절이 딱 이맘때였다(검색해 보니 88년 11월23일로 나온다). 전두환은 거기서 2년을 머물렀다. 백담사와 신도들은 그를 품어 줬다. 광주시민을 죽이라고 명령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5·18 광주뿐만 아니라 1천700년 불교 역사상 가장 치욕을 안긴 장본인이다. 80년 10월27일 전두환이 주도한 신군부세력은 불교를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해 전국 사찰의 스님을 강제로 연행해 조사했다. 그리고 2주 뒤 발표된 언론에는 스님들이 비리승려·사이비승려·폭력배로 매도됐다. 불교계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불교계에서는 이를 ‘10·27법난’이라고 부른다. 2007년 노무현 정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했고 2008년 3월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10·27법난법)까지 제정됐다.

국가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불교계가 지금 자행되는 국가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안타깝다. 국가폭력을 피해 조계사에 들어온 한상균 위원장에게 조계사 신도회 임원들은 나가 달라며 물리력을 행사했다. 옷이 찢어지고 험한 말을 듣는 수모를 당했다. 한상균 위원장은 불자다. 그는 손목에 늘 염주를 끼고 다닌다. 불자이기에 그가 받은 상처는 더 깊었을 것이다.

신도회의 이런 행동은 박근혜 대통령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상중에 소집한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섬뜩한 기운이 도는 말을 쏟아 냈다. 대통령이 민주노총 위원장을 콕 찍어 “수배 중인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종교단체에 은신한 채 2차 불법집회를 준비하면서 공권력을 우롱하고 있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말은 조계사가 한상균 위원장을 계속 보호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조계종단은 대통령의 이 발언을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처지다. 10·27법난기념관 사업에 정부예산 1천670억원을 지원받기로 돼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 정부는 노사정 타협 과정에서 돈을 미끼로 한국노총을 압박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정부가 공권력을 내세워 노동계를 겁박할 때가 아니다. 지금처럼 노동계와 정부가 치킨게임을 벌이기엔 우리 경제가, 시민의 삶이 녹록지 않다. 내년에 우리 경제는 위태로운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수출이 계속 감소세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다. 수출 대기업의 생산이 줄면 고용이 위협받게 된다. 소비도 만만치 않다.

그간 정부는 대출을 확대해 경제를 떠받쳐 왔다. 대출규제를 풀어 집도 사게 하고 소비도 늘리게 했다. 건설업은 반짝 호황을 누렸다. 물론 집 없는 노동자는 전월세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저금리에서나 가능했던 정책이다.

그러나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금융권이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출이자도 오를 것이고 금융권은 부실채권을 우려해 기업 대출금부터 회수하려 들 것이다. 수출감소로 공장가동률이 떨어지고 자금압박까지 덮치게 된다.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정부가 노동법 개정을 밀어붙이는 이유도 기업 구조조정과 무관치 않다. 정부와 여당은 이런 속내를 감추고 노동계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계는 정부와 여당을 신뢰하지 못한다.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당분간 민주노총 위원장을 보호하면서 노사정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조정 역할을 하기에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나 국회보다 화쟁위원회가 더 나을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욕심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화쟁위원회가 주도해 양대 노총, 정부·여당, 야당까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를 구성할 수 있다면 역사적으로 큰 성과일 것이다. 5일 2차 민중총궐기에서 시민의 성숙함을 확인했다. 그동안 화쟁위원회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줬다. 화쟁은 화합과 통합의 사상이다. 우리 사회의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데 화쟁위원회가 밀알이 되길 바란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