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이 국회 앞 정문에서 1인 피케팅을 하고 있다. 며칠 전부터다. 유난히도 잦은 겨울비를 단신으로 맞으며 서 있다.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국회가, 특히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의결을 막기 위함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대상은 기간제법과 파견법이다. 9·15 노사정 합의 내용에 반하는 입법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요즘 양대 노총 위원장의 신세가 말이 아니다. 김동만 위원장은 국회 정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조계사에 있다. 원래 있음직한 자리가 아니다. 본래 두 위원장의 자리는 노동현장이 아니던가. 국회 정문과 사찰이 웬 말인가. 피케팅이든 사찰 은거든 나름 의미 있는 의사표시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조합원들이 보기에는 매우 낯설다.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선두에 선 모습이 어울릴 법한데 왜 유별난 방법을 택한 것일까.

원인을 하나로만 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정부에서 집회·결사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는 현실 탓이다. 단적인 예가 12월5일로 예정된 민중총궐기 불허다. 정부는 불법 시위와 집회가 예상된다는 이유로 집회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는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유와 민주를 입헌으로 정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의사표시의 자유는 절대적이고 불가결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대한민국 헌법 제21조1항).

재산기본권이나 복지기본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게다. 인류사회 발전이 바로 의사표시의 자유 보장과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누구는 이와 같은 집회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허가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경청할 만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자유권의 의미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되짚어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집회의 자유와 시민의 안전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 정답에 가깝다. 만약 폭력적인 수단이 예상된다면 그 부분만 제거해서 집회를 허가하면 그만이다. 방법은 너무나 많지 않은가. 지금의 불허 방식은 편의적인 행정일 뿐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행정이다.

돌아보면 정부만 탓할 수도 없다. 오늘 두 위원장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우리 시대 노동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들이 ‘노동’과 ‘일자리’를 그토록 외쳤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지분은 작아지기만 한다. 정부와 국회는 노동법을 재개정하면서 이젠 더 이상 노동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대화의 상대방으로서의 지위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혹여 우리 스스로가 양대 노총 위원장을 그렇게 내몬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요즘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사회정치 상황을 20~30년 전과 오버랩하는 일이 많아진다. 20년 전과 오늘의 양대 노총 위원장과도 자연스럽게 비교해 보게 된다. 1996년 12월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됐을 때 양대 노총은 손을 잡고 저항했다. 그 선두에는 대표인 위원장들이 섰다. 모든 노동자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그 결과 불과 수개월 만에 날치기법을 폐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 힘으로 노동과 노동자를 위한 정당도 만들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당시 그 자리에 선 위원장들의 위상은 그 누구보다도 높았다.

희망컨대 김동만 위원장과 한상균 위원장이 서 있는 자리에 셀 수도 없는 많은 응원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조계사와 국회에 일반인이 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자들이 함께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 자리가 ‘공식적인’ ‘집회’가 돼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진정 사회적 대화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나.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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