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우 기자

“언론에서는 반올림이 몽니를 부려서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합니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 산업보건검증위원회는 1년여의 조사 끝에 직업병 피해자 보상계획과 산업안전보건 개선방향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어요. 보고서 내용도 반올림이 8년 가까이 삼성전자에 요구했던 수준입니다. SK하이닉스는 보고서를 전격 수용하겠다고 밝혔어요. 반올림의 요구가 몽니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삼성전자가 의지가 있었다면 (반올림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는 방증아닌가요?”

공인노무사인 이종란(39·사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는 지난 25일 SK하이닉스 검증위가 발표한 보고서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반올림은 2007년부터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직업병에 걸린 피해자들에게 삼성전자의 사과·예방·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와 관련해 피해자 개별보상 수준을 넘어 재발방지책을 요구한 것이다.

반올림은 올해 보수언론과 경제지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백혈병 보상위원회를 발족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올림이 무리한 요구로 직업병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반올림의 ‘무리한 요구’가 삼성전자가 아닌 경쟁사 SK하이닉스에서 현실화했다. 외부인사로 꾸려진 검증위는 하이닉스 청주공장 M8라인과 이천P&T 공장을 대상으로 유해인자 분석과 작업환경에 대한 역학조사를 진행했다. 검증위는 직업병 피해자 보상대상 질병 범위를 14종의 암, 8종의 희귀난치성질환으로 확대했다. 자연유산·불임과 자녀의 소아암·희귀난치성질환도 보상대상 질환에 포함시켰다.

검증위는 사업장 산업보건안전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화학물질 및 작업환경 분야(66개) △건강영향관리 분야(25개) △산업안전보건 및 복지제도 분야(36개) 등 127개 개선안을 SK하이닉스에 제안했다. 공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특성을 파악해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노사가 함께 안전보건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안전보건 과제들에 대해 최고경영진이 참여하는 자문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SK하이닉스는 “안전한 사업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검증위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지난 25일 밝혔다. 이종란 활동가는 “반도체산업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사업장을 만들기 위해 삼성전자 경쟁사인 SK하이닉스가 먼저 나서 다행”이라며 “SK하이닉스가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은 삼성전자가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매일노동뉴스>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 농성장에서 이 활동가를 만났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에 직업병 문제의 사회적 해결(사과·보상·예방)을 요구하며 52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영업비밀이 가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기업문화

검증위는 이천공장과 청주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 356종이 영업비밀로 분류된 성분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중 영업비밀로 분류된 151개의 성분 물질을 분석했다. 이천·청주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천 6개, 청주 1개)에서 영업비밀 물질이 1~80% 가량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증위는 독성이 높은 에틸벤젠과 크레졸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영업비밀로 인정될 수 없는 만큼 SK하이닉스가 공급회사에 시정을 촉구하라고 권고했다.

이종란 활동가는 검증위의 권고에 대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생산업체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 중 영업비밀로 분류된 물질 중 일부는 화학제품 공급업체가 성분 물질에 대해 반도체 회사 알려 주기를 꺼리는 물질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화학물질 노출평가가 어려운 이유는 화학물질 독성에 대한 정보가 없거나 영업비밀 물질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활동가는 “SK하이닉스가 검증위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에 연구·조사가 가능했고, 원청이 공급업체에 시정을 권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며 “영업비밀을 이유로 생산공정에서 사용되는 모든 화학물질의 이름과 성분을 공개하지 않은 삼성전자와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달 20일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를 일부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대한 정보는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이 활동가는 “노동부는 삼성전자가 독자 개발한 물질이 존재할 수 있어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궤변”이라며 “반도체 회사가 성분 물질을 알고 있는데도 공개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업비밀이 아니라 자료공개를 거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가 질병과 업무연관성을 직접 입증해야 하는데 유해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업무연관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면서 “노동부가 화학물질 정보공개를 거부한 것은 삼성전자의 눈치를 본 것”이라고 단언했다.

SK하이닉스가 산업보건안전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127개의 과제를 수용한 것에 대해서는 “SK하이닉스가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안전한 사업장을 만드는)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8년 동안 문제 해결을 미루고 있는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적 해결 원칙은 독립성과 투명성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협상은 지난해 5월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 이후 해결책을 찾는 듯했지만 이후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의 요구로 출범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는 올해 7월 조정권고안을 마련했다. 조정위는 1천억원 규모의 공익법인을 설립해 직업병 피해보상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원회의 반대로 조정권고안은 빛을 보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백혈병 보상위원회를 통해 직업병 피해보상을 신청한 피해자들에 대한 자체 보상을 하고 있다.

이종란 활동가는 “삼성전자의 관심은 오로지 여론”이라고 비판했다. 삼성전자가 보상위를 통해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언론보도를 통해 직업병 문제가 매듭지어지는 것처럼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활동가는 “삼성전자는 마치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합의서를 비밀로 유지하고,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보상금 지급시 수령확인증을 요구한 것은 삼성전자가 직업병 문제를 빨리 끝내려고 하는 단적인 예”라고 비난했다.

그는 직업병 피해협상이 사실상 중단된 현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활동가는 “삼성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반올림을 폄하하는 기사가 하루에 100건씩 올라오면서 기사를 열어 보는 것조차 두려웠다”며 “무엇보다 (같이 활동하던) 피해자 가족들이 가족대책위를 설립해 반올림을 비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며 두 달 가까이 농성 중이다. 이 활동가는 “조정권고안은 조정위가 직업병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한 것”이라며 “반올림·삼성전자·가족대책위가 조정위에 의견을 제시해 조정권고안의 내용을 조율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정위 활동 방향에 대해 그는 "조정위를 통해 협상을 하든 삼성전자와 직접협상을 하든 중요한 건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를 삼성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라며 "반올림은 삼성전자·가족대책위·반올림 누구도 참여하지 않는 독립된 기구가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활동가는 "SK하이닉스 검증위가 마련한 보고서는 하나의 좋은 예"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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