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선 공인노무사(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필자가 속한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는 서울의 몇몇 노동복지센터와 함께 해당 지역의 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진행한다. 처음에는 “어린 학생들이니 아르바이트할 때 억울한 일 당하지 않도록 기본적인 내용만 알려 주면 되겠지”라는 가벼운 생각에 임했다.

허나 몇 차례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단순히 청소년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아야 할 노동법의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노동자가 될 이들에게 노동과 노동인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함께 만들어 나가고, 진정한 ‘노동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교육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점차 짙어졌다. 과거에 쉽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특히 최근 청소년 노동교육에서는 현재 맡고 있는 구제신청 사건의 조합원들과 비슷한 분야에 진출하려고 준비하는 학생들이라서 그런지 더욱 마음이 쓰였다. 노원구의 특성화고교 학생들인데 학교에서 보건간호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다. 평소 진행했던 청소년 노동교육과 마찬가지로 노동법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하고, 기초적인 노동법 내용을 알려 주는 수준으로 교육을 이어 나갔다. 2교시에 걸쳐 수업이 배정돼 노동3권과 관련해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내용도 설명해 줬다.

하나보다는 여럿의 단결된 힘을 비유한 짧은 영상을 끝으로 수업을 정리하려는데 어떤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그럼 나중에 회사에 가서 노동조합을 하면 억울한 일은 절대 안 당하는 건가요”라고 질문했다. 필자는 “당연하죠. 혼자만의 힘으로는 법에서 당연히 보장하고 있는 권리라도 주장하고 지켜 내는 게 매우 어렵지만, 여럿이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다면 억울하게 당할 일은 없겠죠”라고 답해 주고는 황급히 수업을 마쳤다.

교실문을 나서는데 뭔가 내가 너무 구태의연한 답만 준 것 같아 아쉬움과 함께 최근 맡게 된 사건의 조합원들이 겹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서울에서 자치구 최대 규모의 병원시설을 갖추고, 노동자만 150여명에 달하는 요양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직원들이 손 씻는 비누나 수건까지도 직접 사비로 구입해 쓰게 하고, 산재를 신청했다고 직급을 강등했으며, 경영상 어려움이 있다며 휴일수를 그 어떤 동의도 없이 축소하는 열악한 근로환경이 계속됐다. 참다못한 물리치료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지부를 만들었다. 그 뒤 병원은 어용노조를 만들었고, 지부는 교섭권을 잃고 소수노조가 돼 버렸다. 그러자 민주노조에 대한 사측의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지부장에게는 사실확인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2년 전 일을 들먹이며, 연이은 보복성 징계를 내렸고, 정당한 조합활동에 대해 업무방해를 했다며 회사는 노조 간부를 상대로 9천만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죄로 고소까지 했다(현재 고소는 무혐의로 결론 났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진행 중이다). 뿐만 아니라, 조합원 대다수가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노동자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의 부모님에게 직접 내용증명·고소장을 보내 “당신 자식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단도리(단속)를 잘해라”는 식의 겁박을 주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 회사의 이러한 행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더욱 힘을 모아 싸워 나가면 된다는 투쟁의 열의를 높여 줬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조합원들로부터 들은 안타까운 내용은 사업장 내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 치료사들의 태도였다. 어용노조에 가입한 직원들은 자신들도 노조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으면서 지부장을 비롯한 다른 조합원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느니”, “병원 분위기만 망쳤다느니” 같은 비난을 면전에 대고 퍼부었고, 나눠 주는 유인물을 받아서는 보는데서 찢어 버리고, 종일 파트너로 일하는 동료의 일거수일투족을 병원에 날조해 보고하는 것도 모자라 어용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조합원이나 직원들은 하나씩 집단 따돌림을 하는 유치한 행동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조합원들이 사건진행을 위해 상담 중 가장 속상해 하며 말하던 부분은 바로 이러한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노무사님 이러한 동료들의 행동은 어떻게 구제신청이 안되나요”라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눈빛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들이 진작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이 아닌, 남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나아가 노동인권에 대한 공교육이 이뤄졌더라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최근 대통령이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발언으로 국정화 역사교과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오히려 ‘정치인들의 노동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혼(?)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노동자와 노동권에 대해 바르게 못 배워 혼(?)이 비정상이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역사교과서로 청소년들이 좌편향 될까 우려된다는 억지는 집어치우고, 국정화에 쓸 노력과 자원을 노동인권에 대한 교과과정을 마련하는 데 기울여 위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이 나간 행동을 하는 자들을 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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