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기자

"외환위기 때보다 더 살벌한 것 같아요."

김현정(46·사진) 사무금융노조 위원장은 정부·여당이 나서 일반해고 완화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확대를 밀어붙이는 지금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기업이 줄도산하고 옆에 있는 동료가 없어졌던 1997년 외환위기 때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지금도 거리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이른바 노동개혁 입법안까지 통과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노조는 끝장이죠. 끝장."

금융권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한파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금융노동자들이 체감하는 위기는 심각하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돌아서자 정부는 경제활성화 해법을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에서 찾았다. 안정된 고용은 불합리한 관행으로 몰렸다. 기업의 인사관리 시스템을 능력 위주로 개편해야 한다며 노사자율 영역을 넘봤다. 기업들은 부응했다.

그중에서도 금융권이 사실상 선봉대 역할을 자처하는 모양새다. 역량향상 교육을 하겠다며 저성과자들의 퇴사를 유도한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들을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보내 저성과자로 만든다. 노조를 만들어 회사의 저성과자 퇴출프로그램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노조위원장을 해고한 곳도 있다. 모두 사무금융노조 산하 사업장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본점 앞에서 김현정 위원장을 만났다. 지난달 27일 해고된 이남현 대신증권지부장과 노조가 대신증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꼭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김 위원장은 최근 '대신증권 노조탄압 분쇄, 부당해고 철회, 민주노조 사수 투쟁대책위원회'(대신대책위) 위원장을 맡았다.

"대신증권, 몰염치의 극치 … 노조탄압 폭로하겠다"

- 대신증권에서 사무금융노조 1호 해고 지부장이 나왔는데.


"예전에도 대신증권 노동자들이 노조설립을 시도한 적이 많았는데 다 실패했다. 천신만고 끝에 지난해 1월 53년 무노조 경영을 깨고 노조를 설립했다. 회사는 1년10개월 동안 노조를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이남현 지부장을 면직시켰다. 우리는 이 사태를 이남현 지부장 한 사람의 문제나 대신증권 노사 문제로 보지 않는다. 대신증권이 민주노조를 해고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한판 싸움으로 보고 대신대책위를 꾸렸다. 대신자본의 노조탄압과 악랄한 노무관리를 폭로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겠다. 대신자본이 사무금융노동자들을 잘못 건드렸다."

대신증권은 지난해 477억7천여만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이어룡 회장은 지난해 급여 13억5천400만원, 상여금 6억5천600만원을 합해 20억1천만원을 받았다. 이 회장의 아들 양홍석 사장은 9억7천900만원을 가져갔다. 회사가 흑자로 돌아서고 회장 일가는 수십억원씩 챙겼지만 직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지난해 6월 희망퇴직으로만 302명이 나갔다.

김현정 위원장은 "노동자들은 300명이나 내쫓으면서 자기들은 몇 십억원씩 가져갔다"며 "몰염치의 극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무금융 노동자들이 웬만해선 잘 움직이지 않는데, 노조활동을 이유로 지부장을 해고한 대신증권 사태에 대해서는 상당히 격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조만간 대신증권 전 영업점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할 계획이다. 최근 SNS를 통해 1인 시위 지원자들을 모집했는데 순식간에 모집인원이 차서 마감했다고 귀띔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2금융권에서는 매각에 따른 구조조정이 이슈였다. 지금은 구조조정 양상이 성과와 연동해 저성과자 퇴출로 바뀌는 것 같다.

"상당수 금융회사들은 기본적으로 성과연동형 임금체계를 갖고 있다. 성과연동형 임금체계는 승진이나 연봉을 차등하는 정도였지, 지금처럼 노골적인 퇴출수단으로 악용되지는 않았다. 최근 1~2년 사이에 퇴출프로그램으로 변질되고 있다. 정부가 쉬운 해고 분위기를 잡아 주니까 자본들이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선도적으로 퇴출프로그램을 도입해 확산하고 있다. 도입 순서도 정해져 있다. 공공기관 다음에 1금융권·2금융권·제조업 순이다. 금융권은 고액연봉 운운하면서 공격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사무금융 노동자들이 많이 퇴출됐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많이 퇴출되고 있다. 살벌할 정도다. KB손해보험은 저성과자들을 대상으로 역량향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MG손해보험도 올해 초 비슷한 교육을 진행해 논란이 됐다. 모멸감을 주는 교육이다. 하루 종일 동영상 교육을 시킨다. 1분마다 클릭하게 해서 화면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교육 참여자들이 모두 결막염에 걸려 고생했다.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모멸감을 못 견디고 나간다. 문제는 저성과자를 누가 만드냐는 것이다.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저성과자가 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내년에 임기가 끝나면 저성과자 1호로 분류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파견 확대, 정규직 잘라 비정규직 채우겠다는 심산"

- 정부는 파견 허용업무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파견법에 따르면 보험 및 금융관리자가 파견 허용업무에 들어가 있다.


"노동시장 구조개악의 핵폭탄은 파견 허용업무 확대다. 지금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만 얘기하고 있어 파견 허용업무 확대를 놓치고 있다. 이게 현실화하면 정규직들은 다 잘라 낼 수 있게 된다. 회사들은 비용을 절감하고 얼마나 좋겠나. 연봉 1억원 받는 사람 해고시키고 다른 곳에서 해고당한 사람 5천만원 주고 파견으로 쓸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든 해고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 넣겠다는 거다. 재벌만능 국가다. 재벌만을 위한 정권이다."

- 증권업계에서는 자기매매와 관련 규제강화가 현안이다. 일부 증권사에서는 자기매매 실적을 성과급 산정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자기매매가 고객을 위해 지양해야 하는 행위라는 지적이 있는데.

"증권사는 최저 한도의 기본급을 책정하고 나머지는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 실제 동부증권이나 메리츠증권은 기본급이 150만원밖에 안된다. 증권사 직원들은 턱없이 낮은 기본급 때문에 관행적으로 자기매매를 해 왔다. 그래야 성과급이 나오니까. 물론 자기매매가 옳은 방식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확산시켜 놓고 이제 와서 성과급에서 자기매매 실적을 빼겠다는 게 말이 되나. 증권사가 자기매매를 부추길 때는 금융감독원이나 금융투자협회가 규제하지 않고 방치해 두더니 이제 와서 다른 얘기를 하는 거다. 비정상적인 성과급 체계를 바꿔 주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자기매매 규제강화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고객들에게 약정을 강요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과도한 경쟁과 수익을 못 낸 직원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비정상적인 성과급 체계부터 바꿔 달라는 것이다."

-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사무금융 노동자들에게도 헬조선인가.

"증권업종을 예로 들어 보자. 과거 정부가 증권업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면서 증권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은 과당경쟁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 비용절감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했다. 노동자가 살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더니 노조를 탄압하고 말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실패한 정책의 책임을 왜 노동자들만 져야 하나. 결국 정권이 철학을 바꿔야 한다. 노동자 서민을 위한 정치, 소득 주도 성장, 경제민주화로 철학을 바꿔야 한다. 이게 안 되면 헬조선 상태가 고착화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이 스스로 철학을 바꿀 수 있겠나. 스스로 안 하니까 투쟁해서 바꿔 내야 하는 거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이 노동자들의 삶과 직결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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