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사 국정교과서 추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정국이 박근혜와 반(反)박근혜로 나뉘고 있다. 몇 년째 반복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땅 노동자들에게 과연 이 대립이 유익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보수우익과 박근혜 개인의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한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황당한 일이긴 하나 반박근혜 진영을 대표하는 세력이 내세우는 역사 논리도 그리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일 논쟁을 보자. 1919년 세워진 임시정부와 1948년 분단 후 유엔 승인 아래 세워진 정부 중 누가 현 대한민국의 원조냐 하는 논쟁이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정통성이 없는 만큼 북한과 분리된 후 세워진 정부가 원조라는 주장이다.

보수우익과 박근혜 정권이 헌법 전문까지 부정하며 이 논쟁을 벌이는 진짜 의도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친일파 논란 지우기다. 대한민국 원조 논쟁에서 이들이 승리한다면, 이들의 친일 행적은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일이 되고,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 역사적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노동자계급 입장에서 보면 친일이 문제였던 만큼 친미도 문제였다는 것이다. 역사적 친일파가 20세기 초 식민지배의 조력자들이었다면, 역사적 친미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의 지배권을 초국적 금융자본에 넘기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미국 자본의 권리를 헌법 위에 둔 세력이다. 20세기 초 친일파에 뿌리를 둔 것이 새누리당이라면, 2000년대 친미파를 대표하는 것은 IMF 구조조정과 한미FTA를 주도한 새정치민주연합이다. 내 생각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친일파의 반대편에서 면죄를 받는 만큼 노동자들의 고통이 커질 것 같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 경제는 생산한 부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수탈당했다. 노동자들은 초과수탈을 견뎌야 했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도 지체됐다. 친일파는 그 수탈의 조력자들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노동자계급과 조선 민중의 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수탈 경제구조는 화폐와 소유권이었다. 조선의 은행들은 일본 은행권에 대한 태환기능이 신용의 핵심이었는데, 조선의 화폐가 일본 엔화에 대한 태환기능을 지닌 엔본위제 통화인 탓이었다. 경제적 관계를 지배하는 통화를 일본이 쥐고 있다 보니 수탈도 그만큼 구조적으로 쉬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이 일본인 소유라 생산한 만큼 일본으로 부가 빠져나갔다.

우리가 친일파 논쟁에서 빠뜨리고 있는 게 지금도 형태만 다르지 상황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IMF 구조조정을 거치며 한국 은행들은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을 제외하면 모조리 외국인 소유로 바뀌었다. 규제 없는 금융시장으로 인해 많은 달러를 보유해야만 원화가치가 유지되는 외환 의존적 화폐체계도 만들어졌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다수 상위 수출대기업들은 외국인 지분이 50%에 육박하고, 외환위기 직후 알짜기업들이 외국인자본에 헐값에 팔려 지금까지도 ‘먹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화폐와 자본시장 전체가 외국자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화폐·소유권 관계가 일제 강점기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노동자들이 만든 부가 외국으로 유출되며, 노동자 초과착취와 국민경제 발전을 제약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새정치민주연합이다. 이들이 역사교과서 논쟁에서 친일파의 반대편에 서서 과거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수록 현재 노동자들이 당하는 고통 역시 정당화된다. 노동자계급에게 역사적 공정함은 친일파와 친미파 모두를 교과서에 싣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교과서의 또 다른 뜨거운 쟁점인 박정희 논란도 그렇다. 박정희는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를 동원하고도 그 성과는 모두 재벌에게 줬다. 그는 재벌이 생산성이나 기술혁신 없이도 국내 부의 상당수를 독점할 수 있도록 했고, 경제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익은 총수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가 분담하도록 경제시스템을 만들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독재를 대가로 산업화를 이룬 게 아니라 노동자를 희생시켜 재벌들을 키웠다. 어차피 노동의 희생이야 별로 다루지 않으니, 박근혜 입장에선 독재만 지우면 그녀의 가문이 사면을 받게 된다.

그런데 박정희의 독재 기반 재벌육성이 문제였던 만큼 2000년대 정권들의 개혁을 명분으로 추진한 금융화 정책도 노동자계급에게 심각한 문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금융허브 정책이 대표적인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나타났듯이 금융화는 경제의 불안전성, 투기의 확대, 자산 소유자의 막대한 이득과 소득 불평등, 저임금 일자리 확대 등을 초래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비정규직이 가장 크게 확대됐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자산 불평등과 가계부채가 빠르게 증가한 건 익히 알려진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계급에게 공정한 역사교과서는 독재와 재벌만큼 개혁과 금융화로 인한 노동자 희생을 싣는 것이어야 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근현대사 논쟁에서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이 독점한 쟁점에 의해 노동자계급은 배제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막아 내야겠지만 동시에 어느 편에 서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역사와 정치세력을 만드는 것이 노동자운동에는 가장 중요한 일이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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