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백재봉 선생
▲ 이광택 국민대 명예교수(산업사회연구소장)

노동법학계의 원로이자 목회자인 백재봉 선생이 10월28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경남고·서울법대 출신인 선생은 우석대·고려대 교수를 거쳐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 1980년 5월15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참가했다. 신군부에 의해 85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해직됐다가 84년 9월에야 복직됐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선생은 해직기간 중 대치동에서 영문교회를 개척하는 한편 한신대에서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계명론’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된다. 이화여대에 복직해 학무처장을 중임하기도 했으나 93년 정년을 10년이나 남기고 퇴임, 양재동에 있는 한사랑교회 담임목사로 임직해 제2의 인생으로 목회활동에 주력하셨다.

선생은 사회보장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1959년(대학 졸업연도)에 이미 '사회보험제도의 서론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서울대학교 법학>에 발표하는 등 선각자의 모습을 보이셨다. 62년 ‘한국 근로기준법에 대한 특수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66년에 설립된 우석대 법경대학 교수로 취임하셨다. 우석대가 71년 고려대에 합병됨에 따라 고려대 교수가 됐으나 75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돼 이듬해 이화여대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선생은 이후 81년까지 <한국노사문제연구소 논집>,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노동문제연구> <서울대학교 법학> 등에 다양한 노동법 논문을 발표하셨다. ‘노동쟁의의 적법판정과 가처분’(1969), ‘운수노조와 크로즈드숍제도’, ‘삼공농기 Co. 임금분쟁사건과 생산관리’(1970), ‘노동조합 설립의 자유’(1971), ‘노동조합의 성립과 운영’·‘경기부양과 노동보호’(1972), ‘쟁의권제한에 관한 연구’·‘노동쟁의와 그 조정’(1973), ‘제2조합(경쟁조합)의 법적지위와 노동조합법 제3조5호’(1974), ‘노동쟁의의 적법성 심사제도’(1976), ‘근로자의 개념과 조합가입자격’(1977), ‘한국노동법의 오늘의 과제’(1978), ‘노사협의회와 단체교섭’(1981)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벌이셨다.

선생은 ‘한국노동조합의 과제’(1971), ‘사회정의와 법학교육’(1972), ‘노동조합과 근로자’·‘노동력보호의 과거와 현재 : 노동과 휴식’(1973) 등의 논문은 기독교 잡지인 <제3일>에, ‘노동법의 원리와 실제’(1977)는 <기독교사상>에 발표하셨다.

선생은 특히 암울했던 70년대에 도시산업선교회 전문위원·크리스찬 아카데미 노조간부 교육위원으로 헌신하고,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 노조간부 교육과 서울YWCA 노동조합 여성간부 훈련에 정열적으로 참여하셨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에서 선생의 역할에 관해서는 민청련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에도 나타난다.

“이날의 주제는 74년도에 강원룡 목사가 원장인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노조간부 지도력개발교육’에 참석해 작성한 프로그램 내용이었다. 백재봉 이화여대 교수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는데, 각자 자기 인생계획표를 작성해 보고, 죽어 묻히게 됐을 때 쓰이기를 희망하는 묘비명을 생각해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쌍팔년도(88년)인 올해 통일을 이루고, 그 전 언제쯤에 민중정당을 창설하고, 70세 넘어서 죽게 되면 ‘여기 인간을 사랑하던 한 사람이 묻히다’라고 적힌 묘비가 세워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미 유언을 남기고 활동하는 철저한 폭력주의자로 저들에 의해 악랄하게 선전되게 됐던 유일한 근거는 이것이었다.”(한겨레 1988년 7월21일)

목사로 전업하신 93년 이후 노동법학계에서는 더 늦기 전에 선생의 70년대와 80년대 활동에 관한 증언을 듣기로 했다. 2004년 6월 상지대에서 개최된 한국노동법학회 정기학술대회에 선생을 초청했는데, 선생의 가족으로부터 건강상 원주까지 여행이 불가하다는 통지를 받게 됐다.

다시 11년이 지나 선생의 부고를 접하게 되니 2004년 당시 한국노동법학회 회장이었던 필자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다. 선생의 유해는 10월30일 일산병원에서 발인, 벽제승화원에서 화장돼 장흥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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