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6일은 고 황유미씨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발암물질로 인해 발병한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날이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8월21일 선고를 통해 고 황유미씨와 고 이숙영씨의 백혈병이 업무상재해라고 판결했다. 세계 최초의 반도체 백혈병 산업재해 사례가 된 것이다. 지난 8년간 피해자들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전문가·시민 등 많은 이들의 말할 수 없는 노력과 고통이 있었고, 지금도 강남 한복판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2012년 11월 항소심 진행 중 삼성은 소송단에 협상을 제의했다. 삼성이 가장 두려워했던 점은 백혈병 인정사례를 법원 판결로 남기는 것이다. 논의 끝에 반올림이 협상에 참여하게 됐다. 이후 지난해 8월 반올림과 6명의 피해가족이 결별해 가족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반올림·가족대책위원회·삼성이 교섭을 하게 됐다. 그 이후 가족대책위와 삼성의 요구로 ‘조정위원회’가 꾸려지게 됐다. 삼성은 "조정위원회를 수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선전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반올림을 비난했다.

결국 반올림은 조정위에 참여했고 올해 7월23일 조정위 권고안이 발표됐다. 삼성과 가족대책위 일부(5명)는 ‘신속한 보상’을 이유로 권고안을 거부했다. 9월3일 삼성은 단독으로 보상위원회를 구성해 피해 가족들과 개별적으로 만나 보상을 하고 있다.

삼성 백혈병으로 지칭되는 이 사건은 4명이 법원에서, 3명이 공단에서 산재를 승인받았다. 39명이 공단과 법원에서 쟁송 중이다. 그리고 217명이 삼성반도체 및 LCD사업장에서 당한 피해를 제보한 상태다. 일단 사건의 규모, 직업병의 성격, 쟁송 과정, 당사자들의 대표성으로 볼 때 이 사건의 실질적 대표는 반올림이다. 삼성은 조정위에 반올림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을 때와 보상위 구성 및 개별 보상방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족대책위와 입장이 동일했다. 삼성은 5명의 피해자만 중요하고 나머지 200명 이상의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다.

보상위를 통한 개별보상 방식과 수준도 문제다. 삼성이 개별적인 권리포기각서를 징구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신속한 보상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으면 대체 8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올해 5월14일 권오현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제3의 중재기구가 구성되도록 하고, 중재기구에서 나온 보상기준과 대상 등 필요한 내용을 정하면 그에 따르겠다”고 발표한 것은 실언에 불과한 것인가. 이 사건 쟁송에서 의학적 상당성을 부정한 전문가를 위촉한 보상위가 공정정과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건의 본질은 “산업재해와 그에 대한 책임, 배상의 문제”일 뿐이다. 이미 삼성이 8년 동안 부정해 왔던 산재가 국가와 법원에서 정식으로 승인됐다. 그간 삼성은 부정과 은폐, 책임회피로 일관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산재의 본질은 기업의 안전관리 소홀로 인해 발생한 범죄행위다. 이를 은폐하고 개별 보상으로 책임을 졌다고 치부하는 것은 또 다른 책임회피다. 기업과 자본의 속성상 어쩔 수 없다고 단정할 부분이 아니다.

일부 피해자가 개별보상을 요구하는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이 사건의 본질이 은폐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 사건은 피해자 및 그 가족, 더 나아가 삼성에 소속된 모든 노동자와 그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자산업 등 전체 노동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그 범주가 바뀐 지 오래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직업병과 직업성 암 문제, 기업의 안전관리 문제, 산재법률의 한계 등 각종 문제가 제기됐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삼성이 밝혔듯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녕은 회사의 핵심가치”다. 하인리히 법칙을 보더라도, 7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업장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삼성의 시각처럼 특수한 개별 문제이거나 산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삼성의 잘못된 안전관리 책임이 실종되고, 노동자 죽음이 개인의 불운 탓으로 돌려지고, 개별 보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왜곡돼 선전되고 있다.

안전보건관리의 기본원칙 중 1순위는 ‘최고경영자의 자세와 의지’다. 지난 8년간 삼성이 보여 준 자세와 의지는 ‘산재 문제 은폐와 책임회피’일 뿐이다. 이제 실질적 대표가 나서야 한다. 그 책임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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