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에는 시민호민관이라는 독특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옴부즈맨 제도라는 게 일종의 민원조사관인데, 시흥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달리 호민관이 상근하면서 독임제로 운영한다. 비상근에 합의제로 운영하는 다른 지자체 옴부즈맨 제도와는 권한·책임 수준이 비할 바가 아니다. 초대 시흥시 호민관을 지낸 임유씨는 “약자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야 그나마 균형추가 맞다”고 말한다. 그가 호민관 시절 보고 듣고 만난 시민들의 얘기를 <시민은 억울하다>(한울)는 책으로 냈다. <매일노동뉴스>가 일부 내용을 발췌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게재한다.<편집자>

사례 1 : 상담 따로 허가 따로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나름 ‘빽’이 있다는 B씨가 어린이집 운영을 계획 중인 30대 초반의 딸을 대동하고 시청을 방문했다. 특정 지역에서 가정 어린이집 설치가 가능한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은 모녀는 곧바로 장소 물색에 나섰다.

그런데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부임한 담당자가 “그 지역은 신규 설치가 불가능하다”며 기존 입장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말만 믿고, 다니던 직장까지 사표를 내던진 B씨의 딸은 난감했다. 시청을 방문해 인가 가능성을 재차 물어봐도 불가 입장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분노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터졌다. ‘불가’라고 했던 곳에 떡하니 신규 어린이집이 인가가 난 것이다. 그러나 분통은 터져도 혹여나 ‘밉보일까 봐’ 다음을 기약하며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새로운 해가 시작됐기 때문에 신규 허가가 날 것으로 기대했던 모녀에게 “수급계획 자체가 없다”라는 얘기가 전달된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들이 호민관을 찾았다. 당초 시가 약속한 대로 가정 어린이집 설립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작년 3월부터 누리과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바람에 보육 기관별 정원이 확대됐습니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어린이집 인가가 이뤄지면서 ○○지역의 공급비율이 100퍼센트를 초과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9월)에는 ○○지역이 신규 인가 제한지역으로 묶이게 된 것이고요.”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책임(?)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담당자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오케바리! 모녀가 시청을 처음 방문한 시점이 6월이었으니 그 당시에는 신규 설치가 가능했다는 말이렷다.” 그러니까 6월과 8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만 밝히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다른 쪽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고 하니 말이다. 먼저 상담한 B씨를 제치고 나중에 상담을 한 ○○○어린이집을 먼저 허가해 준 이유는 또 어떻게 확인하지? 수사기관이라고 해도 어려운 일 같았다. 진술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퍼즐을 맞춰 가다 보니 얼추 그림이 완성됐다. 이랬다. B씨가 상담을 먼저 한 것은 분명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가 신청을 하지는 않았고 이 무렵 ○○○어린이집이 허가를 받은 것이다. 팩트가 드러나자 비로소 쟁점이 보였다. 상담이 허가의 전제조건인지 여부와 상담을 하면 인가절차를 안내해야 하는지 여부, 그리고 신규 어린이집 선정기준은 신청순인지 등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상담은 허가의 전제조건이 아니었다. 영유아보육법은 “신규 인가 신청을 위한 상담 요청을 받을 경우 해당 지자체는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시에 ‘인가 절차 안내’를 강제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면 더는 어쩔 수 없는, 뭐 그런 상황이었던 셈인데, 딱히 이를 빌미 삼아 시의 잘못을 추궁할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시의 답변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잘하겠단다.

그러나 선정기준은 정말이지 문제가 많았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지 반년이 다 돼 가는데도 보육계획은 발표되지 않았고 신규 어린이집 선정기준도 수립되지 않았다. 부정이 싹틀 여지가 생긴 셈이다. 일정한 기간을 정해 신청을 받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선정하면 아무런 얘기도 나오지 않을 텐데 담당자 마음 내키는 대로 허가를 해 주다 보니 ‘내가 먼저니 네가 먼저니’ 하는 잡음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시의 잘못을 추궁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선정기준이 없었으니 먼저 신청한 순서대로 허가를 내준들 이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시의 답변도 예상대로였다. 앞으로는 선정기준을 잘 만들어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으며 제때에 시행계획도 발표하겠단다.

웃는 얼굴로 민원인을 맞이하다가도 누구누구를 안다며 은근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면 낯빛부터 바뀌곤 한다. 힘이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라치면 나 역시도 한때 청와대에서 근무했음을 은연중 드러내는 편이라 남 비난할 자격은 없는데 말이다.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 더 모질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도 ‘빽’ 하고 죽는다는 나라에서 살았으니 그 정도의 거만함은 애교로 봐 줄 만한데 나의 적반하장은 이렇듯 간혹 분수를 모른다. 솔직히 그놈의 빽이 통하지 않아 호민관한테까지 온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면 빽을 언급하는 사람이 가장 힘없는(?) 시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살다간 어디 가서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을 것이라는 충고도 들었던 데다 민원인을 대하는 태도로서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 ‘빽 거부증’을 고치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 나았는가 싶다가도 이따금씩 배알이 크게 틀어지기라도 하면 불끈불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어린이집 문제를 호소하던 그 민원인도 사실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을 텐데 시의원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의 못된 버릇이 재발해 버렸다. 질문이 삐딱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민원인의 하소연도 변명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움찔했다. 그럼 정말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민원인이 요구한 대로 ○○지역에서 어린이집 설치가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작년에는 정원을 초과해 신규 설치가 불가능했지만 금년부터 그 지역의 정원이 늘어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정기준을 정해 이를 공표하라고 했더니 금년부터 선착순이 아니라 추첨 방식을 택하겠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이런 걸 두고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고 하는 건가. 결과를 알려 주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괜히 미안해졌다.

[어린이집 신규 인가]

시 보육정책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육계획 및 연도별 시행계획을 수립하고 어린이집 인가 시 이를 판단기준으로 활용할 것.(영유아보육법 제11조, 동법 시행령 제19조, 동법 시행규칙 제5조)

보육계획은 5년마다 수립하고 매년 2월 말까지 연도별 시행계획을 수립해야 한다.(영유아보육법 제19조2항)

어린이집을 설치하고자 하는 자는 보육수요 등 지역여건 및 어린이집 설치기준에 관해 관할 시장·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사전에 설치 전 상담을 요청할 수 있으며 요청을 받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이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영유아보육법 시행규칙 제4조2)

사례 2 : 안전이냐, 형평성이냐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제법 큰 규모의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택지 지구로 지정돼 어린이집이 수용됐던 것인데, 이사를 가야 하는 날짜까지 채 석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도 어린이집 장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구한 자리를 시가 부적합 판정을 내린 것이 위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사 가고 싶은 자리는 지금의 어린이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원생들의 통학에 유리하다는 것이 제일 큰 장점이었다. 주상복합아파트 상가에 위치하고 있어 좀 시끄럽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뿐 여러모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관련 부서(가족여성과)와의 사전 상담에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출입구 반대쪽에 위치해야 하는 비상구 하단이 ‘안전한 외부 지표면으로부터 1.2미터 이내여야 한다’는 비상재해대비시설 설치기준(보건복지부령)을 충족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이집 설치가 불가능합니다.”

애초부터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 있던 원장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답변이었다.

“우리가 이사 가려고 하는 상가는 앞에서 보면 1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2층입니다. 그리고 건물의 가운데 부분이 뻥 뚫려 있는 ㅁ자 모양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부분이 사실상 공개 공지의 기능을 해서 비상시에는 바로 지표면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가정 어린이집의 경우에는 실제 2·3층에도 설치 인가가 나는데 왜 우리한테만 그렇게 가혹한 기준을 갖다 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장은 기가 막혀 했다. 호민관이 개입할 이유가 충분해 보였다.

‘안전’ 기준인가 안전한 ‘기준’인가

영유아보육법(제15조, 제15조의2, 제15조의3)은 어린이집을 설치하려면 보건복지부령이 규정하고 있는 각각의 기준을 맞추도록 하고 있는데, ‘어린이집 설치기준’과 ‘비상재해대비시설 설치기준’이 그것이다. 그 기준에 따르면 보육실은 건축법 시행령상의 층수와 관계없이 1층에 위치해야 하고 출구(비상구) 하단이 외부 지표면으로부터 1.2미터 이내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민원인이 이전하고자 하는 어린이집은 ‘사실상’ 2층에 위치하고 있고 출구(비상구)의 하단 또한 외부 지표면으로부터 1.2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설치를 인가할 수 없다는 것이 시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원장의 억울함이 일리가 있었다.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부득이하게 어린이집을 이전해야 하는 민원인의 현 상황은 본질적으로 시흥시의 책임을 요구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린이집 설치의 불가사유로 들고 있는 것 중 ‘보육시설 1층 위치’ 문제는 이미 설치 인가를 받은 몇몇 가정 어린이집이 필로티 구조로 인해 실제적으로는 2·3층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다툼의 여지가 있었고, ‘비상재해대비시설 설치기준’ 역시도 ‘건물 외부’에 대한 해석과 ‘도로 또는 대지’ 및 ‘직접 연결’에 대한 판단에 따라서는 달리 적용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주무부서인 가족여성과의 입장이 너무 완강했다. 호민관이 어떤 의견 표명을 한들 받아줄 리 만무해 보였다. 우회 전략이 필요했다. 권고 대신 조정과 중재의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민원인(호민관을 포함해)의 의견과 가족여성과의 입장을 그대로 기술해 보건복지부로부터 유권해석을 받아 본 후 그 결과에 따라 어린이집 설치 여부를 다시 판단해 주십시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는 듯 시는 재빠르게 호민관의 중재를 수용해 버렸다. 좀 더 싸워 볼 걸 그랬나, 후회가 살짝 들었다.

돌연한 변심

내 원 참. 유권해석을 받기로 했으니 좀 기다려 달라 전화를 한 것인데, 무슨 심산인지 그토록 격렬히 저항(?)하던 원장의 태도가 그사이 180도 바뀌어 있었다. 그만하겠단다. 다른 장소를 알아보겠노라고. 도대체 왜 그러느냐 물었지만 그저 묵묵부답이다. 다만 ‘어차피 어린이집을 계속하려면 시에 밉보여 좋을 게 뭐 있겠는가’ 하는 자기검열 결과 아니겠나,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난, 지금도 여전히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계속 진행했더라면 보건복지부가 어떤 해석을 내줬을지를.

[어린이집 설치기준]

보육실은 건축법령상 층수와 관계없이 해당 층 4면의 100분의 80 이상이 지상에 노출돼 있고, 해당 층 주 출입구의 하단이 지표면으로부터 1미터 이내인 층에 설치해야 한다.(영유아보육법 제15조, 동법 시행규칙 제9조 및 별표 1)

[비상재해대비시설 설치기준]

비상시 양방향 대피가 가능하도록 주출입구 외에 ‘안전한 지상과 바로 연결되는 비상구 또는 출구’를 설치해야 하며 출구의 하단은 안전한 외부 지표면으로부터 1.2미터 이내로서 건물 외부의 도로 또는 대지 등에 안전하게 직접 연결돼야 한다.(영유아보육법 제15조의3)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