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저성과자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금융권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직원들을 영업실적대로 등급을 매기겠다고 나서는 실정이다. 또 역량향상 교육을 명목으로 저성과자들의 퇴사를 유도한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들은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배치해 저성과자로 만든다. '일반해고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으로 우려된다.

◇1등부터 꼴찌까지 점수 매기겠다는 KB국민은행=KB국민은행이 지난 19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자기계발 및 영업실적 자가진단서비스'는 쉽게 말해 반 석차, 전교 석차, 전국 석차와 등급까지 보여 주는 중·고등학교 모의고사 성적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자신의 영업·자기계발 실적이 같은 직무·직급·직위를 가진 직원들 중에서 몇 등이나 되는지, 전국적으로는 몇 등이고, 몇 등급에 해당하는지 성적표를 나눠 주겠다는 얘기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내 영업실적이 이 정도구나 알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연수나 자격증 공부도 더하지 않겠냐"며 "직원 개개인의 자발적 자기계발과 영업력 향상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평가 결과는 본인만 볼 수 있도록 한다"며 "상급자나 다른 직원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을뿐더러 인사고과에도 반영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은행측의 설명에도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인사고과에 반영하지 않는데, 굳이 힘들게 직원 개개인의 실적을 데이터로 구축하고 등급을 나눌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저성과자를 추리는 사전작업이라는 비판이 거센 배경이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은행측은 직원들이 성과를 보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라고 하겠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고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라는 것과 같다"며 "중간 이하 평가를 받은 직원들은 희망퇴직 대상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받을 수 있고, 자칫 저성과자를 퇴출시키는 제도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희망퇴직 거부자 특수보직 발령도=현대라이프생명보험은 올해 7월 실시한 희망퇴직 과정에서 신청을 거부한 직원들을 업무와 무관한 엉뚱한 부서로 배치해 부당배치전환 의혹을 받고 있다.

사무금융노조 현대라이프생명보험지부에 따르면 회사는 희망퇴직 거부자 27명을 1~2차에 나눠 관리역이나 특수보직으로 발령했다. 박기태 부지부장은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복발령을 내고, 부서에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상황에서 과제를 내고 매일 평가하고 있다"며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괴롭히겠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예컨대 영업점 직원을 IT부서로 보내 전산 관련 프로그램을 설계해 오라고 하고, 상품개발팀 직원을 보험금심사팀으로 보내 보험금 접수 에러를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준다.

문제는 과제수행 기간을 정해 놓고도 매일 과제수행 여부를 평가하고 점수를 주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부지부장은 "부서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도 않고 부서장이 매일 불러 '왜 이거밖에 못했냐'며 C를 주고, '만족스럽지 않다'며 D를 주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준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쉬운 해고'에 발맞춰 현대라이프생명보험이 벌써부터 퇴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ODS 부서 만들어 노조 조합원 발령=HMC투자증권은 지난해 ODS(방문판매) 부서를 만들어 희망퇴직 거부자와 노조 조합원들을 발령했다.

증권투자상담 자격증도 없는 본사 IT부서 근무자가 하루아침에 고객을 만나 서비스를 하는 부서로 보내졌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했는데도 HMC투자증권은 발령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

노명래 사무금융노조 HMC투자증권지부장은 "ODS 부서는 직원이 외야에서 계약을 체결해야 하기 때문에 실적이 저하될 수밖에 없고 회사 스스로도 ODS 부서를 '아오지'라고 부른다"며 "그런데도 회사는 ODS 부서를 저성과자 퇴출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 지부장은 "이런 저성과자 퇴출 프로그램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발표한다면 회사에 칼자루를 쥐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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