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사회학에서 잘 쓰는 개념 중에 문화지체(cultural lag)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의 핵심은 문화는 개인에 외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문화의 변동과 개인의 사고가 따로 놀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지체 상태의 개인은 문화와 규범이 변동하는 것에 부응해 변화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는 개인이다. 이러한 문화지체 개념은 한국 사회의 정치변동을 설명함에 있어, 특히 국가와 사회의 관계의 변동을 파악하려 할 때 유용할 수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 우리 사회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뭐니 뭐니 해도 민주화(democratization)였다. 우리의 민주화는 국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구성원들은 민주주의에 목말랐다. 사회운영의 기본가치로 민주주의가 구석구석에서 작동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확산됐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여타 재야의 정치운동·시민운동 등은 민주화의 중요한 촉매로 역할을 했다.

90년대 말 한국의 기존 집권세력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야당에 권력을 넘겨야 했다. 그 원인에는 문화지체가 있었다. 민주화 무드(mood)가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에 기반한 공정한 제도운영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열망이 한껏 커졌다. 반면 당시 집권세력은 온갖 비리와 특권을 남용하는 집단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과거 스캔들과 달리 그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더욱 냉랭했다. 이른바 ‘병풍’으로 불리는, 당시 여당 지도자에 대한 도덕성 훼손 같은 게 그렇게 큰 정치적 파괴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사회구성원들의 민주주의 기대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집권 정치세력이 2000년대 말 권력을 재획득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정하게 문화지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차떼기 당’ 같은 부정적 이미지 쇄신을 위해 천막당사의 냉랭한 자리까지 택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당시 겸허한 야당으로서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사뭇 진지했고, 결과는 공당으로서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고 권력의 재탈환을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민주화된 사회가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열린 사회(open society)를 추구한다면, 그것과 조응하지 못하고 특권과 비리의 길, 불통과 톱다운(top-down)적 호통에 집착하는 정부는 닫힌 국가(closed state)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변동의 동학(dynamics)에서 중요한 요인은 사회는 열려 가는데 국가가 얼마나 자신을 열면서 그에 조응할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아쉽게도 한국의 국가는 2000년대 말 '촛불집회'와 '명박산성'이 대결하던 때를 기점으로 점점 닫힌 국가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집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현재 정부는 전방위에서 개혁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노동개혁·금융개혁·역사교과서 개혁…. 한번 진지하게 짚어 보고 싶다. 그것은 얼마나 열린 사회의 구성원들의 기대와 열망에 부응하는 소통방식을 취하고 있을까. 반대파의 목소리를 얼마나 용납하고, 정치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을까. 사회구성원들이 스스로를 개혁의 주인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만들어 움직여 가도록 얼마나 잘 독려하고 있을까.

노사정 대타협을 종용하며 바람을 넣고 일정하게 그것이 물질화됐음에도, 정작 입법은 정부와 여당의 입맛에 맞는 것들부터, 그것도 타협의 정신에서 벗어나 속도와 의제에 있어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모습을 띠며 돌진하려는 모습은 닫힌 국가의 모습이다.

기관별로 상이한 조건에 처해 있고, 다원주의적 노사관계 발전이 필요한 공공기관들에서, 현행 근로기준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임금피크제의 도입을 획일화된 기준에 따라 전일적으로 종용하는 모습도 열린 국가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획일적 사고를 초래할 우려를 무시하며 그게 올바르다고 강변하며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열린 사회와 닫힌 국가는 끊임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정부가 사회를 향해 쌓은 담의 높이를 높이고, 뚫어 놓은 확성기의 볼륨을 높여 갈수록 둘 간의 갈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최근까지 우리의 현대사가 일깨워 주는 교훈에 의하면, 열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닫힌 국가는 조만간 문화지체의 상태에 처하게 되고, 성공적인 정책효과를 거두기도, 정권의 재창출을 이루기도 힘들어진다. 닫힌 문 안쪽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빨리 깨닫고 무리한 행보를 자제해 열린 사회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 가길 바란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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