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영민 공인노무사(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

대상판결 : 대법원 2015.7.9 선고 2012다20550 판결

사안의 개요


원고들은 농협협동조합자산관리 주식회사와 채권추심업무계약을 체결한 후 6개월의 계약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재계약을 하면서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배정받은 채권에 대한 추심업무를 주업무로 했고 회사가 제공한 사무실에 출근해 회사가 제공한 컴퓨터와 프로그램·전화기 등을 이용해 일을 했다. 기본급이나 고정급은 없고 실적에 따라 수수료를 지급받았다. 회사는 이들에게 보고의무·교육참석의무를 부과했고 회사 규정의 미준수나 실적 부진, 업무처리능력 부족, 업무수행 부적격 등을 계약해지 사유로 정했다. 그리고 회사는 채권추심원에 대한 관리 부서를 두고 이들에 대한 출퇴근 상황과 업무 실적을 감독했다.

그러던 중 2008년에 다른 채권추심원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회사는 대책 마련을 위해 회의를 했다. 그 결과 회사는 채권추심원에 대한 출근부 등을 작성하지 않고 개인별 회수예상액 등에 대한 보고를 폐지했다. 이어 회사는 업무수행이나 실적관리, 계약해지 사유 등을 삭제하는 내용으로 채권추심원들과 체결하는 계약서 양식을 변경했다.

원고들은 2008년 6월 이후에는 변경된 계약서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퇴사한 원고들은 자신들이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지급받지 못한 퇴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회사측은 원고들이 위임계약에 따라 수임업무를 수행했을 뿐이고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았으므로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사건의 쟁점은 이들이 2008년 변경된 계약서로 계약을 한 이후에도 근로자성이 인정되는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1·2심 재판부는 각기 다른 판단을 내렸다. 1심 재판부는 계약 형식의 변경에도 채권추심원들의 업무수행과 회사의 지휘·감독을 인정해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2008년 6월 변경한 계약서 양식에 따라 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는 원고들을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변경된 계약서에서 지휘·감독에 관한 내용이 삭제돼 회사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의 정도가 약해진 점 등이 근거였다.

대상 판결

대법원은 다시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① 회사가 계약서 양식이 변경된 이후에도 채권추심원들과 재계약하면서 종전의 계약서를 사용하기도 하고, 변경된 계약서를 사용했다가 이후 다시 과거 계약서 양식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피고 스스로도 계약서 양식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② 채권추심업무는 회사의 사업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업무로 회사는 채권추심을 담당하는 인력이 상시적으로 필요했고, 적정한 업무수행을 보장하기 위해 채권추심원들의 업무에 대해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고자 하는 유인이 큰 점 ③ 회사는 변경된 양식에 따라 채권추심업무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팀제도·전산시스템 관리제도·상벌제도를 통해 채권추심원들의 출퇴근과 업무실적 등을 계속 관리해 왔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④ 원고들은 변경된 계약서가 사용되기 훨씬 전부터 피고와 반복적으로 채권추심업무계약을 체결해 왔는데, 계약서 양식이 변경된 이후로 원고들의 업무수행 방식과 피고의 지휘·감독 정도가 근로자성을 달리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실질적으로 변경됐다고 볼 만한 자료도 부족한 점 ⑤ 변경된 계약서에서 제3자에 의한 업무대행을 금지하는 규정이 삭제됐다 하더라도 피고의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추심업무를 수행해야 하고 팀장을 통해 업무를 통제받는 채권추심원들이 제3자에게 추심업무를 대행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⑥ 채무자와의 면담 등을 위해 출장근무가 많은 채권추심업무의 특성상 회사가 근무시간과 장소를 제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근로자성을 부정하는 주요 징표가 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을 들어 변경된 계약서 양식에 따라 채권추심업무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정만으로 이전과 달리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게 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상 판결의 의의

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가에 대해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근로제공관계의 실질이 근로제공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①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취업규칙 또는 복무규정 등의 적용을 받으며 업무수행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②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근무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제공자가 이에 구속을 받는지 ③ 근로제공자가 스스로 비품·원자재나 작업도구 등을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하게 하는 등 독립해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 ④ 근로제공을 통한 이윤의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는지 ⑤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⑥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고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⑦ 근로제공관계의 계속성과 사용자에 대한 전속성의 유무와 그 정도 ⑧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법령에서 근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의 경제적·사회적 여러 조건을 종합해 판단하되, 다만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사회보장제도에 관해 근로자로 인정받는지 등의 사정은 사용자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그러한 점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

2심 판결이 이 기준에 따른다면서도 2008년 이후 계약서 양식 변경이라는 형식에 강조점을 두고 판결했다면, 대상판결은 사용자가 형식적으로 계약서 양식을 변경해 제3자를 통한 업무대행 금지와 본인의 노무 제공의무, 근로의 대가성을 띤 보수, 근로의 시간적·장소적 제약 가능성, 지시·감독이 가능한 각종 의무의 부과, 노무의 질에 대한 평가에 의한 채용, 전속적 근로제공 등에 관한 규정을 삭제했어도 계약 형식의 변경이 아닌 근로제공관계의 실질을 살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성을 판단했다.

특히 회사가 2008년에 채권추심원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근로자성으로 인정될 소지가 있는 용어와 계약서를 변경해 새롭게 계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단지 계약서 양식의 변경만으로 근로자성을 부인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 것에 의의가 있다.

마치며

오늘날 취업이나 고용형태는 나날이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수반해 사용자의 지휘·명령권은 과거와 같은 직접적·구체적인 것에서 간접적·포괄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용자들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근로계약이 아닌 위임이나 위탁계약을 활용하는 것이다.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함에도 계약 형식에 따라 노동자냐 아니냐가 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노동자도 사용자도 아니어서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정부 통계로도 50만명이 넘는 것이 이 나라의 우울한 현실이다. 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법원은 실질에 부합하는 판단으로 사용자들의 책임 회피에 쐐기를 박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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