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강하게 추진한 건 무엇보다 장기 저성장을 대비하는 자본의 중장기적 요구 때문이었다.

저성장으로 인한 기업 경영 악화는 이미 재벌대기업까지 비교적 빠르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감시하는 48개 대기업집단 중 절반 가까이가 부채비율 200%를 넘어섰고, 10개 기업집단은 영업이익으로 금융이자도 내기 힘든 처지다. 세계경제나 한국 내수 여건을 봤을 때 이들 대기업들이 매출을 늘려 재무구조를 개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남은 건 결국 또 노동자를 쥐어짜 이익을 늘리는 방법뿐이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는 기업들에게 꽤나 효과적인 인건비 감축수단이다. 노조가 없는 곳에서는 이미 권고사직·희망퇴직 등의 이름으로 해고가 빈번하게 이뤄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였다. 성과평가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객관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일반해고 완화는 사업주가 언제든 인원을 줄이고, 이를 무기로 임금을 삭감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고용정보원 통계(2013년)에 따르면 한 해 220만명 정도가 비자발적으로 퇴직을 하는데, 이 중 100만명 정도가 기타 회사사정에 의한 퇴직·근로조건 변경·질병 등 사실상 일반해고에 해당했다. 그리고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 이런 비중이 더 높았다. 일반해고에 대한 제약이 큰 상황에서도 이 정도였는데, 이 빗장이 풀리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대기업들은 상시적 인원조정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상태다.

이런 경제적 배경 외에도 정권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강하게 추진한 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청년취업 문제를 조직노동 탓으로 돌리고픈 정권의 이해가 강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올해 투쟁이 정권을 흔들 만큼 크지 않았고, 여론도 정부·여당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요컨대 경제적으로 보면 저성장 조건에서 자본의 중장기적 이해관계를 볼 때 언젠가는 필요한 것이었고, 정권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경제 실적이 필요한 절박함이 있었는데, 노동자운동의 저항이 생각보다 크지 않자 한꺼번에 밀어붙여 보려는 상황인 듯하다.

현재 상황은 1996년과 비슷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3저 호황 효과가 사라졌음에도 재벌들이 해외차입을 통해 과잉투자를 지속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재벌들의 부채비율은 300~500%까지 상승했다. 김영삼 정권은 95년부터 노동시장 유연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는데, 노동자를 쥐어짜 부채를 갚는 길 말고는 재벌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이 아직 상황을 뒤엎을 만큼 힘이 없다고 봤고, 김영삼 대통령 지지도가 높아 얼마든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96년 12월25일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97년 외환위기를 피해 갈 순 없었다.

현재 당시만큼 재벌들의 재무구조가 부실하진 않지만 그 시기보다 세계경제는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이긴 하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몇 년간에 걸쳐 그럭저럭 회복된 건 재벌들의 부채를 국가와 노동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전가했고, 여기에 세계경제가 2000년대 호황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 내내 고통받은 반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수입은 빠르게 회복됐다. 세계경제 호황 탓에 소위 말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공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경제 자체가 불황이다. 한국 경제가 꽤 오랜 기간의 저성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노동시장 이중구조 자체도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쥐어짜야 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이번 노동시장 구조개혁에서 일반해고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건 정규직의 과잉 안정성 탓에 청년고용이 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대기업 정규직도 저임금 고용불안에 동참해야만 사업주들이 이윤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그 생산성에 기대어 수익을 높이는 것이 본연의 작동방식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때에는 언제나 자본주의 자체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다는 방증이다. 97년만큼 급격하게 위기가 발생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더 오랜 기간 경제위기가 저강도로,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의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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