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노동계와 야당이 노사정 합의에 부정적인 만큼 쟁점사안이 국회에서 원안대로 입법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합의라고는 보지 않는다.”

김동원(55·사진) 국제노동고용관계학회(ILERA) 회장(고려대 경영대학장·경영전문대학원장)의 말이다. 지난 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ILERA 세계대회에서 3년 임기 신임 회장에 선출된 김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노사관계 전문가다. 그는 이달 13일 도출된 노사정 합의에 대해 “합의 내용의 완결성이 부족해 미완의 합의에 그친 점이 아쉽고, 노동계 협상 주체로 참여한 한국노총의 대표성 문제도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특히 "세계가 주목하는 노동이슈는 파업이나 단체협상보다는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라고 강조했다. <매일노동뉴스>가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 한국인 최초로 ILERA 회장에 취임한 것을 축하한다. ILERA를 소개해 달라.

“ILERA는 각국 노사관계와 노동시장·노동법을 연구하는 세계 최대 학술조직이다. 1966년 설립돼 스위스 제네바 국제노동기구(ILO)에 본부를 두고 있다. 35개국 노사관계학회가 가입해 있다. ILO가 예산과 인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학술기구인 동시에 공적기구로서 성격을 갖는다.”

- 아시아인으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ILERA 회장에 선출됐다. 어떤 의미를 갖나.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다. 또 노사관계에 대한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이 세계적 대열에 올랐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노동연구 수준은 외국학문을 수입해 소개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노동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한 학자들이 최근 들어 훌륭한 이론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이제는 외국의 학자들이 우리의 연구내용을 인용해 가는 단계에 왔다.”

- 2018년 ILERA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리는데.

“ILERA는 3년에 한 번 노사관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대회를 개최한다. 지난 1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17차 대회가 열렸다. 18차 대회는 의장국 자격으로 대한민국 서울에서 치러진다.”

“파업 관심 줄고, 비정규직·양극화 국제이슈 대두”

- 최근 열린 ILERA 남아공 대회의 주제는 ‘변화하는 노동의 세계(The Changing World of Work)’였다. 각국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어떤 이슈에 주목하고 있나.


“단체협상이나 파업 같은 문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양극화와 비정규직·빈부격차·이민노동 문제가 대체하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런 문제가 동시다발로 나타나고 있지만 세계적 화두는 불안정 노동이나 노동자의 삶의 질에 집중되고 있다. ‘노동문제는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이는 착각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 틈을 비집고 새로운 노동문제가 발생하고, 갈등은 또 다른 해법을 찾도록 한다.”

- 미래학자들은 ‘노동의 종말’을 예언한 바 있다. 우리는 노동이 없는 사회로 가고 있나.

“<노동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의 예언대로라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세상이 왔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기계는 보조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산업이 고도화할수록 공장에서 일하는 제조업 노동자는 줄어들 것이다. 그 대신 관리업무나 행정업무 같은, 인간의 판단이나 통제 또는 손길을 요하는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 노동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고용관계는 어떻게 변화하나.

“노동자 집단이 대단위 사업장에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며 풀타임 노동을 하기 시작한 역사는 1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자영업자나 가내수공업자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고용관계가 점차 해체되고 느슨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수고용직 문제가 대표적이다. 기업과 노동자를 묶고 있던 끈이 약해진다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특수고용직 문제가 노동인권이나 착취 문제를 동반하는 것도 이런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사관계 성숙해야 노사정 대타협 가능”

-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이 도출됐다. 어떻게 지켜봤나.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다는 것은 우리나라 노사관계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뜻이다.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노동운동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노동자단체와 사용자단체가 사회적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을 닦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합의는 98년 노사정 대타협 이후 나온 두 번째 대타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번에도 합의에 실패했다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무용론과 폐지론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욱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 노사관계 전문가 관점에서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이번 협상에서 다뤄진 의제들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복잡한 내용이었다. 그렇다 보니 완결된 합의에 이르기보다는 ‘앞으로 이렇게 협의를 해 나가자’는 식의 합의를 위한 합의에 그치지 않았나 싶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협상 주체로 나선 한국노총의 대표성이다. 한국노총은 전체 노동자 대비 5% 정도를 조직하고 있다. 이번 합의에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대책이 미흡한 것도 이런 한계 때문이다.”

- 노동계는 노사정 합의에 대해 형평성을 잃은 ‘기울어진 합의’라고 비판하는데.

"합의 이후 경영계의 반응을 살펴봤다. 요약하자면 ‘현금으로 주고 어음으로 받았다’는 분위기다. 98년 대타협 때와는 달라진 대목이다. 당시에는 노동계가 정리해고라는 현금을 경영계에 주고, 노동기본권이라는 어음을 받았다. 그런데 노동기본권을 어음으로 받다 보니 지급기일이 차일피일 미뤄진 측면이 있다. 노동계가 사회적 대화에 회의적으로 돌아선 이유였다고 본다.

이번 합의에 대해 경영계는 노동시간이나 통상임금·실업급여·산재보험 같은 현금을 내주고, 실현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을 어음으로 받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문제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불발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부도어음 아니냐는 주장이다. 나 역시 야당이 노사정 합의에 부정적인 만큼 노사정 합의문 쟁점사안이 국회에서 원안대로 입법화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합의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 정부는 청년실업 문제의 해법으로 임금피크제를 내놓았다. 정부의 진단과 처방은 유효하다고 보나.

“특정 연령에 도달하면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는 외국에서 보긴 힘든 제도다.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최초로 시행했다. 임금피크제라는 명칭도 고 김정한 박사가 직접 붙였다. 현재 논란이 되는 지점은 임금피크제 시행이 청년고용 확대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연구 결과마다 차이가 있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영향이 크지는 않다. 임금피크제 자체가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제로섬 성격이 강하다.”

- 청년고용을 늘리는 플러스섬 방식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노동자의 88%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일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우선이다. 중소기업복지공단을 만들어 지원을 늘려야 한다. 또 다른 방안은 노동과 교육의 연계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인문계 대졸자들이 갈 곳이 없다. 폴리텍대학과 같은 노동-교육 연계기관을 육성해야 한다. 기업과 사회의 수요를 감안한 대학 구조조정도 불가피하다. 기업도 나서야 한다. 불황일수록 인재는 많다. 기업들이 청년고용 확대에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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