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길 역사연구가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투쟁하고 있다. 투쟁은 진보에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좌우 구도 안에 갇혀 있는 한 진보는 패배를 피할 수가 없다. 진보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좌우 구도 안에서 기득권 세력은 절묘하게 자신의 정체를 은폐한 채 다수를 기반으로 자신의 지위를 재생산한다.

문제는 진보운동 안에서 이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다소간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실순응적 운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과연 현실순응적 운동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진보운동가라면 좌우 구도를 혁파하고 역사의 전진을 보장할 새로운 양자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과연 그 답은 무엇일까. 해답은 언제나 객관 세계 속에서 형성된다.

요즘 사회운동가들의 공통적인 고민 중 하나는 각자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사회가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사회운동이 함께 힘을 모아 문제의 근원을 치유하는 데 소홀했다는 이야기다. 과연 우리 사회의 퇴행을 초래한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지난한 토론을 전제로 가설을 제기하자면 그것은 외환위기 이후 고착된 돈 중심 경제(사회)가 아닐까 한다.

돈 중심 경제(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돈 놓고 돈 먹기가 경제활동의 중심을 이루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도 좋다고 보는 경제(사회)”를 뜻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외환위기 이후 권력의 중심은 재벌로 이동했다. 민주화를 통해 군사지배를 종식시켰으나 새로이 금권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선출되지도 않고 세습되는 전근대적 권력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운데 경제활동이 주식과 부동산을 통해 돈의 가치를 증식하는 데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울러 노골적 수준에서 돈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풍조가 만연했다.

하지만 돈 중심 경제(사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먼저 재벌 중심 승자독식 체제에 대한 이른바 ‘을들의 반란’이 확산됐다. 승자독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의 부산물로서 900조원이 넘는 부동(대기)자금과 1천13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숨통을 조이며 ‘돈맥경화증’이 심화했다. 돈 중심 경제 스스로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던 중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돈 중심 경제의 도덕적 파탄을 알렸다. 세월호 참사의 요인을 들추다 보면 돈에 미친 자들의 역겨운 리스트가 꼬리를 잇는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중의 잠재의식 속에는 돈 중심 경제(사회)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 경제(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비록 막연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돈 중심 대 사람 중심의 양자 구도를 형성될 수 있는 대중적 토대가 마련돼 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사람 중심인가.

여기에는 윤리적 근거가 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라는 말은 이 같은 윤리적 판단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정치적 근거도 들 수 있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돈 중심 세계관과 노동자 계급의 사람 중심 세계관의 투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보통선거제 도입을 둘러싼 투쟁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금권지배를 극복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회복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근거를 들 수 있다. 탈산업화 사회로 전환하면서 가치 창출의 주요 원천이 노동과 자본에서 인간의 창조력으로 이동했다. 노동 자체도 창조적인 작업으로 진화를 거듭할 때 존재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창조경제란 워딩 자체는 타당하다. 가치 창출을 좌우하는 창조력 발산은 사람이 경제활동의 목적이고 활동의 중심이며 권력의 주체일 때 극대화될 수 있다. 결국 사람 중심의 경제(사회)가 될 때 창조경제의 전면적 발전이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돈 중심 대 사람 중심의 양자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좌우 구도를 대체해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대중 의식 지형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다.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합리적 보수층 내부에서조차 돈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의 사고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양자 구도는 이들을 최대한 흡수하고 결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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