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소선 어머니 4주기를 맞이해 이소선 어머니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겨 봄으로써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소선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식민지가 된 나라 농촌에서 태어나 숙명처럼 가난에 짓눌려야 했다. 거기에다 일제에 항거하던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소선의 어머니는 다른 성씨에 개가해야 했다. 즉 어머니가 어린 이소선을 데리고 개가했기 때문에 ‘데려온 자식’이 됐던 것이다.

이처럼 이소선 어머니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천대받는 존재였다. 온갖 멸시와 구박, 인간차별을 받으면서 성장한 어린 이소선은 이런 현실에 굴하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 기존 질서에 항의했다. 어린 나이에 데려온 자식이라며 차별하는 것에 대해 마을 어른한테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관철시켰던 것이나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서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했던 일화는 그의 저항정신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인간 차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소선 어머니의 온 생애에 걸쳐 일관하는 핵심 사상이다. 즉 인간을 차별하는 불평등,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관통함으로써 평등세상을 꿈꾸는 삶을 살아오셨다.

이소선 사상의 핵심은 인간 차별에 대한 항거 

▲ 이소선 어머니와 필자(사진 오른쪽)

이소선 어머니의 삶은 1970년 11월 아들 전태일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 항거한 이후 달라졌다. 평범한 삶에서 이제 아들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노동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 평범했던 삶에서 험난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탁월한 지도력과 남다른 통찰, 과감한 투쟁으로 현실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차별당하고 소외받는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 죽어 가는 아들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신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인간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이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 투쟁 대상과 방법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하는 구조적 모순을 향하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승화됐다고 할 수 있다.

이소선 어머니께서 40년간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실천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많은 가르침 중에 몇 가지를 감히 열거해 보기로 한다.

첫째, 이소선 어머니는 사사로운 이익이나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대의에 충실했다. 70년 11월 아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면서 분신해 죽음에 이르렀다. 당시 그가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책임자는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 당국과 노동자를 착취 혹사하는 자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들 전태일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 책임자들을 향해 이소선 어머니는 “내 아들의 뜻을 이루기 전에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버텼다. 그리고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설립 보장을 요구하며 시체 인수를 거부했다. 이에 당국자들은 이소선 어머니를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돈을 제시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아들의 뜻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관철시켰다. 이것은 이후 어머니의 삶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유신독재 정권은 그 뒤에도 이소선 어머니에 대해 끊임없는 폭력과 협박을 하고 이것이 통하지 않으면 다시 거액의 돈으로 회유하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소선 어머니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이 대의를 지키는 삶을 사셨다.

정권의 회유와 탄압에도 지킨 원칙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운동 과정에 내부투쟁에서도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정도를 걸으셨다.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과 더불어 그들의 역량을 발굴·조직해 그 힘으로 투쟁하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 일례로 75년 12월 청계피복노조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들 수 있다. 당시 청계천 피복공장의 하루 노동시간은 12~14시간이나 됐다. 휴일도 한 달에 이틀뿐이었다. 이런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개선하기 위해 조합원들을 조직하고 투쟁으로 이끌어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당시 투쟁은 노조 집행부 중심이 아니라 조합원 대중의 절실하고 절박한 요구를 조직함으로써 가능했다. 투쟁 결과 노동시간이 하루 10시간으로 단축되고 매주 하루 휴일이 관철됐다. 그러나 노동조합 내부 갈등이 심화하기도 했다. 조합원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그것을 투쟁으로 돌파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집행부와 갈등을 겪었다.

이런 갈등은 이소선 어머니로서는 피하고 싶은 매우 괴로운 것이었다. 당시 노조 집행간부는 다름 아닌 아들의 친구들이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이들을 믿고 의지하고 그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끝내 조합원 대중의 요구와 힘을 선택했다. 이 일로 인해 결국 한국노총식 노동운동 풍토가 물러가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게 됐다. 전투적 청계피복노조의 전통을 이어 가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인간적으로 난처한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났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다. 예를 들어 이소선 어머니의 명성이나 관계를 이용해 기존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께서는 살아 계실 동안에는 이런 것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진정한 노동해방으로의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이소선 어머니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를 사랑하는 실천에 그 어떤 편견이나 편 가름이 없는 분이셨다. 70년대 노동조합 조직은 기업별노조 형태였다. 기업별노조 조직은 박정희 군부 쿠데타 이후 어용화를 위해 자본과 권력이 강제한 것이다. 따라서 70년대 노동운동의 목표는 기업별·산업별 한계를 뛰어넘는 연대로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70년대 이소선 어머니는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자가 고통받고 탄압받는 곳이라면 지역이나 업종을 가리지 않고 어디라도 달려가서 함께 투쟁하고 함께 고통을 나눴다. 특히 이소선 어머니는 투쟁하다 죽어 간 수많은 열사들의 마지막 곁을 지키고 그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온몸으로 투쟁했다. 이소선 어머니의 이 같은 헌신이 모든 노동자들한테 ‘어머니’로 추앙받게 된 원동력이다.

기업별노조 뛰어넘는 원동력 '포용과 연대'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고 포용하셨다. 노동운동 내부에 노동자와 지식인 간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지식인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묶고 상호 보완해 더 큰 힘으로 만들어 냈다. 또한 국적·인종 등을 초월한 연대를 실천함으로써 인류애를 실천했다.

셋째, 이소선 어머니는 70~80년대 척박한 노동현장에서 탁월한 예지와 승리에의 낙관으로 용감하게 투쟁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선도했다. 70년 전태일 사건은 노동자의 권익쟁취에 앞장서야 할 한국노총이 어용화하면서 발생한 측면이 있었다. 이처럼 자주적인 노동운동이 전무하다시피 한 풍토 속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운동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아들의 뜻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투쟁함으로써 자주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틔우고 민주노조 깃발을 세웠다.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의 권익쟁취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기업별 단위에서 투쟁하는 것을 뛰어넘어 지역과 업종 간 연대와 함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압박을 당하는 모든 민중의 단결된 투쟁을 주장하셨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이소선 어머니는 군부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재야 민주세력과 함께 투쟁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구속된 청년학생과 재야 지식인의 가족들과 함께 구속자가족협의회 활동을 하셨고, 재야 민주인사들과 더불어 각종 집회와 투쟁을 전개하셨다. 그중 유신정권의 사법살인으로 악명 높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사형자들의 시체 탈취를 막기 위해 앞장서서 용감하게 투쟁하셨다. 이소선 어머니의 이런 활동이 정부 당국으로부터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구실이 됐다. 그래서 노조 내부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재야 활동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민주화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노동운동의 고립화를 막아 내면서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지 않고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노동운동의 본분을 훼손하지 않고 자주성을 지켰다.

이소선 어머니는 80년대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을 거쳐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유가족을 조직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만들어 활동하셨다. 이소선 어머니의 투쟁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어머니는 민주화운동을 넘어 통일운동에도 앞장서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을 실현하는 것임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셨다.

4주기에 다시 이소선 어머니를 떠올리는 까닭

이소선 어머니는 40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수차례 구속됐다. 숱하게 두드려 맞아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소선 어머니가 온몸으로 가르침을 준 노동자 사랑, 민중 사랑의 고결한 정신은 이 땅 노동자의 귀중한 유산이자 우리 민족의 사표가 됐다.

이소선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4주년이 됐다. 아직도 우리 노동자들은 자본과 불의한 권력에 의해 온갖 ‘인간 차별’을 당하고 있다. 비정규직 차별과 청년실업, 자살률 1위 등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인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도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서민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자본과 권력은 ‘노동개혁’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노동자를 옥죈다. 불의한 자본가 정권은 재벌대기업이 노동자들과 함께 일궈 낸 부를 독차지해 이른바 사내유보금이라는 명목으로 수조원을 움켜쥐고 있는데도 재벌대기업한테는 부담을 주지 않고 오직 노동자에게만 고통을 전담시키기 위해 노동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청년실업이 마치 노동자들의 책임인 양 기만적인 술수를 써서 노동자들과 국민을 이간질하고 있다. 단언컨대 일반해고 요건 완화와 기간제 사용기한 연장, 파견 허용업종 확대, 취업규칙 변경 등의 조치는 90% 노동자들의 고통만을 불러올 것이다.

진정한 노동개혁은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고용이 보장되는 바탕에서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비정규직 최소화, 청년고용할당제 그리고 노동자 경영참여를 통한 이익균점권 보장 등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진정으로 추모하고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소선 어머니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와의 과거 인연이나 들먹이면서 현실에 침묵하거나 왜곡하는 것으로는 이소선 어머니께서 염원하는 ‘인간 차별’ 없는 평등세상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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