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과거 한국경제가 고도성장기를 이어 가면서 거의 완전고용을 구가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일자리 정책은 사실 별 게 없었다. 일자리란 단지 경제성장이 이뤄지면 따라오는 부산물로 이해됐다. 일자리 문제는 성장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외자를 끌어들여 자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해외로부터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후 다시 외국으로 되파는 방식으로 이윤을 남기고 부를 축적해 갔다. 그것을 위해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감내했다. 노동과 자본은 국민경제를 이루는 주체로서 응집된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지금처럼 덩치가 큰 국내자본이 국내 고임금구조를 피해 노동력 가격이 저렴한 생산조건을 찾아 해외를 기웃거리며 국내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과는 완전히 상이한 조건이었다.

바야흐로 저성장 시대, 글로벌 시대다. 일자리를 경제성장의 부산물 정도로 이해한다면 시대착오다. 국민경제의 성장동력이 제약돼 있다. 저성장 기조에 걸맞게 일자리를 어떻게 잘 분배해야 할지, 원심력 지향적인 국내자본을 어떻게 붙잡아 국내 투자를 활성화할 것인지, 그에 필요한 여건과 기회를 적극 조성해 한다. 건전하고 생산적인 해외자본도 국내로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요는 객관적으로 일자리 정책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는 거다. 이러한 때에는 국내에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는 정부가 능력 있는 정부다. 그러한 자본이 ‘예쁜’ 자본이요, 그러한 노조가 '듬직한' 노조라고 볼 수 있다.

노사정 모두의 변화가 필요한 때다. 한 해 동안 국민 전체의 생산활동을 통해 창출되는 부를 어떻게 하면 양질의 고용기회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분배시킬까 궁리하며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부는 무능하고 자본은 얄미운 짓만 하며 노조도 미덥지 못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양질의 고용기회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심화돼 가는 양극화와 바닥에 만연한 청년실업은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방법론적으로 일자리계의 변화를 추구하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주제영역이 있다. 바로 산업구조의 변화, 고용시스템의 변화, 그리고 복지체제의 변화다. 이 셋을 어떻게 조합시켜 앞서 말한 대로 양질의 고용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야 할지 모색해야 한다.

우리의 산업은 보편적으로 대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흡수하며 최상층에 포진하고 있고 그 밑으로 줄줄이 건강하지 못한, 억눌리고 빼앗기는 하청구조가 형성돼 있다. 우리의 고용은 특정 기업에 목을 매는 방식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에 장시간 노동, 짧은 근속연수, 이른 정년 등 노동하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문화적 원리가 노동시장에서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복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적 필요에 부합하지 못할뿐더러 공공성 원리에 맞춰 제공돼야 할 서비스와 사회적 필요들이 지나치게 시장논리·민간비즈니스 논리에 잠식돼 있다. 모두 양질의 고용기회 확대를 제약하고 노동시장 양극화를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저성장 글로벌 경제시대. 험난한 미래의 도래를 앞두고 사회구성원들끼리 공존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세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모를 동반하는 개혁의 길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노사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도 바뀌어야 하고 문제를 진단하는 정보도, 문제의식도 허심탄회하고 심도 있게 교환돼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주목할 만한 변화의 조짐이 우리 사회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내로라하는 전문가·관계자 50명을 위촉해 일자리위원회와 실무위원회를 만들었다. 광주에서는 광주광역시 주도로 사회통합단이 꾸려져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를 개념화하며 양질의 고용기회 확대를 향한 실천의 첫발을 내디뎠다. 충남에서도 지역 상황에 걸맞은 노동정책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심지어 민주노총으로부터 제기됐다고 한다. 도당국도 그에 귀를 기울이고 답을 찾으려 한다.

이들은 모두 지역수준(regional level)에서 저성장·글로벌 경제시대가 안겨 주는 공동체에의 시련을 창의적으로 감내해 가려는 유의미한 몸짓들이다. 과거 기업 수준과 전국 수준에서의 노사관계에만 천착하며 답을 찾지 못했던 양상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지역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 우리 사회의 주체들이 새로운 패를 꺼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많은 권한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가 정치적 계산을 벗어나 적절하게 협력하고 지원해 줘야 한다. 노동조합도 지역 노동시장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역량을 배양해야 한다. 총체적으로는 지방정부와 이해당사자들이 해당 지역에서 주력 신성장 잠재력을 지니는 산업을 세심하게 진단하면서, 앞서 언급했듯이 그 안에서의 생산체인(production chains) 혁신, 고용시스템과 복지체제 개혁을 어떻게 고용친화적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함께 상상하고 뒤적이고 들춰 봐야 한다. 지역에서 일자리 정책의 막힌 출구를 뚫는 시원하고 창의적 실험들이 다양하게 대두되기를 기대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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