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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김미영 공인노무사(노원노동복지센터)
▲ 김미영 공인노무사(노원노동복지센터)

"앗! 화물연대 스티커다! 어, 화물연대 조끼를 입었네!”

막가는 재벌 3세와 열혈 형사의 한판 싸움으로 알고 보러 간 영화 <베테랑>. 그런데 거기서 낯설지 않은 장면이 보였다.

‘아, 이 영화가 사실을 모티브로 한 거였구나.’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해고를 당한 노동자. 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원청으로 향하고, 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그 노동자는 재벌 3세의 방에 가서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는다. 노동자는 "맷값"이라며 돈을 던지는 재벌 3세에 의해 인간적 모멸까지 당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2010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이 벌인 ‘맷값 폭행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어이없는 현실이었으며, 그야말로 ‘슈퍼갑’이 부린 횡포였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속 시원하다”고 한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사건들은 현실이고, 열혈 형사 서도철의 모습은 오히려 비현실적인데도 사람들이 속 시원하다고 느끼는 건 대리만족일까.

지난해 이렇게 속 시원한 동영상을 접하게 됐다. 대리운전 상담실에 걸려온 전화.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고객이라는 남성은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들어 줄 수 없었던 전화 상담원은 그 진상 고객이 욕하는 만큼 똑같이 욕을 퍼부었다. 욕을 퍼붓고, 신고하겠다고 하면 상담원이 기 죽을 거라 생각했을 그 남성 고객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버벅거렸다. 지난해 인터넷에 떠돌던 이 동영상의 전화통화 내용을 듣고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실컷 웃었던 기억이 있다. 진상을 부리는 고객은 현실이요, 응대하는 상담원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전화통화 내용. 과연 을 입장에 있는 전화상담원들이 얼마나 이렇게 대응할 수 있을까.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갑을 응대해야 하는 전화 상담원들. 상담원이라면 당연히 웃으며 고객에게 전화응대를 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회 분위기 속에 노출돼 자신의 슬픔과 분노·화 같은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소위 감정노동자들이다. 노원노동복지센터에서 감정노동자 심리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하루에 50통 이상 공격성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전화상담원 한 분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며 몹시 힘들어했다. 대리운전 상담원 동영상에 대해 얘기하며, 이런 동영상을 접했을 때 속 시원했느냐고 물었다. 실제 상담원들이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대리만족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그 노동자는 동영상 통화내용을 들으면서 웃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본인과 같은 전화상담원들은 패기 있게 고객을 응대했던 전화상담원의 통쾌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내뱉는 그 쓰레기 같은 말들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그래서 그걸 듣는 게 오히려 힘들었다고 한다. 그랬다. 항상 을이 돼 불특정 다수의 갑질을 감수해야만 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상처는 그렇게 깊은 것이었다.

얼마 전 한 늙은 노동자 한 분이 산재 상담을 왔다. 고령의 노동자였고 간단한 사고성재해였기에 간략히 산재 서면을 작성해 주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라 말씀드리고 사고경위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고령의 노동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갑자기 시작되는 고령 노동자의 갑질. 이 노동자는 큰 목소리로 “내가 이사를 갔는데 왜 거기다 우편물을 갔다 놨냐. 이사 가기 전 집에 가 보니, 등기우편을 우체국으로 와서 찾아가라는 게 붙어 있던데 왜 거기다 그걸 붙여 놨냐. 이사를 갔으면 찾아서 가져다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 우체국 명예회원인데 일처리 이런 식으로 할 거냐. 그 등기우편 찾으러 우체국으로 갈 수 없으니 이사 간 집으로 배달해라”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본인의 문제로 우리와 상담할 때와는 태도가 180도 달라져서는 우체국 전화상담원에게 고압적 태도로 일관하며 갑질을 하고 계셨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이분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산재 경위서 쓰는 거 도와주지 말까 보다’라고 생각했다가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한마디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도움을 줄만한 곳이라고 어렵게 찾아와서 한소리 듣고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우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갑이 될 수 있다. 영화 <베테랑>에서처럼 슈퍼갑질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늘 우리가 접하는 전화상담원들에게, 인터넷이나 가전제품 설치기사들에게, 마트 판매노동자들에게, 혹은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에게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라 여기며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갑질을 할 수 있다.

최근 하루에도 몇 번씩 무료로 바꿔 주겠다며 전화기를 교체하라는 전화가 자주 온다. 한창 바쁠 때 전화가 오면 갑자기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전화를 하루에도 수십통씩 걸어야 하는 그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다.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라도 갑질은 하지 말아야지'하며.

김미영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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