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노조가 주최하는 금융인 문화제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1985년 시작된 금융인 문화제는 2년에 한 번씩 개최된다.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창작한 문학·미술 분야 예술 작품을 심사해 각 부문 최고작을 가리는 대회다. <매일노동뉴스>가 올해 열린 제16회 금융인 문화제 부문별(시·소설·사진) 대상 수상작 3편을 차례로 소개한다. 올해는 총 411편의 작품이 출품됐다.<편집자>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이 문장을 몇 번 곱씹어 본 후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깐 멍한 상태로 있어 보기로 했다. 최종 탈락에 대한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실로 나가서 패잔병의 얼굴을 하고 "엄마,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왠지 내 삶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았다. 탈락의 아픔을 위로받는 것은 성장 드라마에나 있는 일이다. 물론 무뚝뚝한 어머니는 자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섭섭해할 자식도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눈은 또렷하게 뜨고 있었다. 한동안 그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구석의 모니터만이 오색빛깔의 화면보호기 탓에 도깨비 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몸속의 어떤 꿈틀거림에도, 외부의 어떤 침략에도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유체이탈을 해 보자. 이렇게 딱 5분만 있어 보자. 이것은 결코 도피가 아니다. 분명히 유체이탈이다. 결론만 말하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내가 유체이탈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면 대개 할 수 없다. 하고 싶지만 믿지 못하는 일들, 그런 일들은 부지기수다. 가령 금연만 해도 그렇다. 담배를 끊고 싶지만, 내가 끊을 수 있을 거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신념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이 의지를 지배하게 될 때,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하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비록 그러한 믿음은 없지만 불가능한 현상을 흉내 내는 것이 때때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믿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니터 불빛의 잔영만이 이불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패전의식은 그렇게 종결됐다.

탈락의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틀 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외국계 IT 기업 씨큐스탠다드코리아(CQ Standard Korea)로부터 인적성 검사 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상반기 공채 중 필기전형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유일한 회사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별 수 없이 하반기 공채를 기다려야 했다.

씨큐스탠다드는 IT 보안 분야에서 단기간에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고, 최근엔 보안기술을 기반으로 기업 IT 경영 컨설팅업체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회사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이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터라 어지간한 회사에 묻지마 지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로울 일도 아니었다. 면접은 불과 나흘 후였고 부랴부랴 인터넷 카페에서 면접 후기를 찾아봤지만 관련된 자료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대비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외국계 회사라고 해도 여느 회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내를 해 주는 데스크 직원은 다소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었지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고 빌딩 안에서 마주친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모두 검은 머리 한국인뿐이었다. 면접을 위해 안내된 장소는 반원형의 고대 그리스 극장 구조의 세미나실이었는데 언뜻 봐도 백 명 정도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공간이었다. 앞쪽의 강단과 옆에 걸려 있는 빔 프로젝트용 대형 캔버스가 대학교 강의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졸업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대학 시절은 이미 까마득했다. 아득한 그 기억은 정확히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라는 정체 모를 신분과의 거리감, 딱 그것이었다. 세미나실에 모인 사람은 대략 서른 명 정도였고, 내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 모의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얼굴에 긴장감과 각오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간에 있으면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도서관 열람실이 싫었고 북적거리는 식당도 가지 않았다. 이 공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데 모여 있는 지원자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자리에 이 사람들과 같은 자격으로 앉아 있으며 그 어색함은 역으로 내가 가진 묘한 열등감이었다. 더 이상 아무런 존재감 없이 살고 싶지 않았다. 이번 면접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

정각이 되자 실무면접이 바로 진행됐고 강단에 오른 진행자는 본인을 경영지원팀에서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김한민 차장이라고 소개했다. 깔끔한 슈트 차림에 머리를 곱게 빗어 유광 왁스로 고정시킨 40대 초반의 남자는 면접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번이 씨큐스탠다드코리아 설립 이래 첫 번째 신입사원 공채입니다. 경력직원 중심으로 수시로 인력을 충원하다 보니 신입사원 공채를 하지 못했었는데 앞에 계신 지원자 여러분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 기대가 많이 됩니다. 오늘 면접은 저와 강단 옆쪽에 계신 박인호 차장님께서 분임토론 및 실무진 면접을 함께 진행하시게 됩니다. 면접은 미리 공지해 드린 대로 영어, 분임토론, 실무진 면접의 순서로 진행되고 총 4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그럼 바로 영어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영어 시험에 팁을 하나 드리자면 영작하실 때 괜히 어려운 단어 쓰지 마십시오. 쉬운 단어로 쓰셔도 충분합니다. 단, 문법에는 꼭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영어시험은 대부분 독해와 영작으로 구성돼 있었고 정신없이 써내려 가다 보니 시험시간 40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못 푼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외국계 회사이다 보니 지원자 중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해외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어가 참 흔해져 버린 시대였다. 영어가 흔해져 버린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은 영어시험이 더욱더 큰 곤욕이었다. 망한 것일까? 마지막 실무진 면접이 제일 중요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시험이 끝나자마자 분임토론을 위한 조 편성이 발표됐고 나는 2조에 배정됐다. 총 4개조로 나뉘어진 지원자들은 회의실 여건상 먼저 1, 2조만 토론을 위한 회의실로 각각 이동했고 나머지 지원자들은 앞선 조가 끝날 때까지 잠시 대기해야 했다. 1조는 박인호 차장을 따라 8층 회의실로, 2조는 김한민 차장의 안내에 따라 9층 회의실로 이동했다. 토론주제는 회의실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공개됐다.

▣ 주제 : 현재 지구상의 인류가 겪고 있는 전쟁, 기아, 바이러스, 자연재해 등 수많은 위험요인을 감안할 때 인류는 언젠가 멸망할 것이 확실하다. 지구 멸망이 불가항력적이라고 할 때 인류의 노력으로 그 시기를 늦추는 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미래의 인류에게 이것은 과연 의미 있는 행위인가? (* 미래의 인류란 지구 멸망으로 인해 멸망 시점 이후 태어나지 못하게 될 인류를 의미함.)

지원자 8명은 직사각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4명으로 나뉘어 서로를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각 자리에는 지원번호와 이름이 쓰인 플라스틱 명패가 놓여 있었고 우측 편에 앉은 나는 주제에서 말한 인류의 노력에 대해 "의미 있는 행위"라는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주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정확히 10분, 그리고 토론시간은 30분이었다. 나는 내 입장에 대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이 입장이 내가 반드시 고수해야 할 신념이며 명쾌한 논리로 상대방을 반드시 설득시켜야 한다. 솔직히 불가항력적인 지구 멸망이 몇 년 늦춰진다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삶이란 그 자체만으로 숭고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몇 번 주문을 걸다 보니 나름 확고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김한민 차장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훑어봤다.

“자, 정리되셨으면 바로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발언하실 분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으신 후 말씀하시면 되고, 다른 특별한 제한은 두지 않겠지만 발언시간이 너무 길어질 경우에는 제가 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토론 면접에서 주제에 어긋난 발언을 하거나, 다른 지원자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에는 감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꼭 명심하시고 토론에 임해 주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자 김한민 차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책상에 놓인 채점표 같은 종이에 눈을 가져갔다. 다들 긴장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김한민 차장은 내가 앉아 있는 오른쪽 편 지원자들을 바라보며 "이쪽에서 먼저 하시죠"라는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토론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지원자 김진입니다. 저는 인류의 노력으로 지구 멸망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결국 우리의 자식들이고,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며,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설령 언젠가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더 많은 생명들이 삶을 누리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한민 차장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는 김진이라는 참가자였다. 흠 잡을 데 없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얼굴이었고, 설명은 나름대로 명쾌했다. 서류전형을 허투루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들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 맞은편에 있던 여성 지원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발언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최소은입니다. 저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봤습니다. 우리의 삶이 객관적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미래의 인류에게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미 멸망하고 있는 절망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건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일 테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토론은 결국 삶의 가치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반대편 입장에서 그래도 삶이란 살아 봐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견이 맞섰고, 사실 이것은 가치판단의 문제이므로 결론이 날 수 있는 성격의 담론이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삶은 과연 살 만한 것인가? 이들은 다 살 만한 걸까? 엉뚱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머릿속에서 기어 나왔다. 토론은 계속됐다.

“지원자 안명섭입니다. 저는 사실 삶의 가치라는 측면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합니다. 하지만 가치라는 것도 그것을 누리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우선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미래에 태어날 수도 있을 인류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삶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전수업만 있는 초등학교 1학년에게 점심 도시락을 싸 주는 격입니다. 주제에서 말하는 멸망 기한의 연장은 결국 가정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가정은 실재가 아니므로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멸망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인류가 갖게 될 고통의 총량이란 것이 언제 멸망하든 거의 비슷할 텐데 그 노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안명섭 지원자는 주제가 갖는 묘한 빈틈을 짚어 주고 있었다. 나도 상대편 입장을 고려했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부분을 반박할 만한 논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한민 차장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있었고 토론시간은 이제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제부터 내가 가진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박지운입니다. 안명섭 지원자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지금 당장 인류가 멸망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오늘 당장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사람에게 죽음이란 것은 엄청나게 큰 의미이니까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삶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요? 이것을 말장난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존재만이 의미를 갖고, 존재의 이유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결국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 노력의 의미란 결국 미래의 존재에 대한 이미 존재하는 자들의 의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궤변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형이상학적 토론의 장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모든 지원자가 발언을 한 상태였고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김한민 차장도 분위기를 대략 파악했는지 양측을 바라보며 발언의사를 묻고 추가 발언자가 없자 토론을 종결시켰다.

토론 면접이 다 끝난 후 지원자들은 다시 세미나실로 모였고 20분 정도가 지나자 김한민 차장이 들어왔다.

“면접 보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치열하게 토론하시는 모습에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면접인 실무진 면접은 지원번호 순서대로 한 분씩 3~5분 정도 진행이 됩니다. 면접장에 들어가면 중간에 경영지원팀장님이 앉아 계시고 양 옆에 저와 박 차장님이 앉아 있을 겁니다. 지원자 분들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질문에 답변하시면 됩니다.”

나는 열한 번째로 면접을 보게 됐고 40분 정도 지나자 내 차례가 돌아왔다. 어지간한 일에 떨지 않는 사람도 1대 다수로 싸워야 하는 채용 면접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긋나는 호흡을 조용히 가다듬으며 중앙에 놓인 의자로 걸어가 가만히 앉았다. 고백성사를 하는 것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기다렸다. 첫 번째 질문자는 김한민 차장이었다.

“오늘 토론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박지운씨는 인류의 노력이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 돼 발언을 하셨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원래는 그렇지 않은데 분임토론이기 때문에 주어진 입장을 말씀하신 겁니까?”

취미나 특기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내가 영 잘못 짚은 것 같았다.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였는데, 주어진 입장에서 논리를 준비하고 말을 하다 보니 마치 오랫동안 가졌던 견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제 견해였는지는 물어보시니 다소 혼돈스럽기도 합니다.”

“주어진 입장과 본인의 입장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반대의 입장에서 토론했다면 마찬가지로 그 입장을 본인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네. 아무래도 토론 주제가 쉽지 않은 가치판단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조금 다르게 묻겠습니다. 지금 둘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합격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그 또한 내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말입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그냥 내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떤 자리에 있든 당당하게 임하고 싶었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인류의 노력은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휴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IT 회사에서 휴머니즘은 대체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이쯤 되니 그냥 편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무지입니다.”

“그렇군요. 답변 잘 들었습니다.”

김한민 차장은 씩 웃고 있었다. 오싹하기까지 한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박 차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박 차장은 인상 좋아 보인다는 말깨나 들어 봤을 것 같은 후덕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자기소개서에 보니, 남미 아마존을 여행했다고 써 있군요. 아마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다. 나는 아마존에 갔었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인 동시에 고행이었다.

“붉은고함원숭이를 본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게 특이한 동물인가요?”

“보기 쉽지 않은 동물입니다. 딱 한 번 멀리서 봤습니다. 이십 미터가 넘어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었는데 붉은색 털과 특유의 울음소리가 뇌리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여행을 하고 나서는 뭘 느꼈습니까?”

이것은 나에게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딜 가도 결국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더군다나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 어떤 경험도 경험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경험 이후의 명상과 반성만이 그것을 가치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취업전선에 뛰어든 나는 생각의 정리는커녕 여행사진 정리조차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미사여구를 섞어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유년기가 있었고, 그 시절은 누구나 그렇듯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다가 12년을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자유가 주어진 대학에 들어가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저 또한 그 유년기의 세포들이 이미 다 죽어 버린 줄 알았는데 여행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음. 얘기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경영지원팀장이었다. 팀장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무표정한 얼굴을로 자기소개서만을 뚫어져라 처다보고 있었다. 어떤 질문을 할지 고르고 있는 듯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합격하고 나서 몇 년 일하다 여행 간다고 그만두는 거 아닌가요?”

“여행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장기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럴 만도 하겠군요. 마지막으로 본인이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 뭡니까?”

“철저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데 자신이 있고, 판단이 빠른 편입니다.”

“알겠네. 수고했네.”

면접이 끝난 것 같아 일어서려고 눈치를 보다가 순간 김한민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박지운씨.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종교에 천주교라고 쓰셨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성당에 자주 가십니까?”

“거의 가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이제 나가셔도 좋습니다.”

5분은 이렇게 지나갔다. 5분의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텅 빈 머리를 한 채 세미나실로 돌아왔다. 세미나실 입구에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하나씩 가지고 처음의 자리에 앉았다. 가지고 온 소설책을 보며 다른 지원자들의 면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책은 거의 한 달째 중간에서 멈춰 버린 ‘해저 2만리’였다. 취업준비생이 이런 책을 읽고 있자니 조금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1부의 마지막 산호묘지 장면까지 읽고 책장에 꽂아 둔 것을 아침에 나오는 길에 가방 속에 챙겨 온 터였다. 책을 편 지 1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지원자들이 모두 돌아왔고 잠시 후 김한민 차장도 들어왔다.

“오늘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금 전에 들어오신 분들은 샌드위치 드시면서 설명을 들으셔도 됩니다. 실무면접 결과는 이번 주 금요일에 홈페이지에 공고를 해 드리고, 문자로도 연락이 갈 겁니다. 돌아가시면서 데스크에서 면접비를 수령해 가시면 되고 혹시 오늘 면접 관련해 궁금하신 사항은 지금 질문하셔도 좋고 끝나고 앞으로 나오셔서 개별적으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몇몇 지원자가 김한민 차장에게 질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개중에는 눈도장을 한 번이라도 더 찍으려는 사람들도 보였다. 채점표가 있다지만 아무래도 실무면접은 인사 담당 책임자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할 것이었다. 나는 그런 눈도장이 아니라 아까 받은 질문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마지막으로 김한민 차장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차장님, 오늘 토론 면접 주제는 조별로 모두 같았습니까?”

“네,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럼, 혹시 아까 제가 실무진 면접에 답변한 내용 자체가 점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까요?”

실무진 면접 때 인류의 노력이 헛수고라고 말한 것이 못내 찜찜했던 것이다.

“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 문제에 따로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박지운씨 답변은 나름 흥미 있게 들었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참 아리송한 답변이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해저 2만리’ 를 다시 펴 들었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면접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인류 멸망이라니, 아무려면 어떠랴. 스마트폰으로 붉은고함원숭이를 검색해 봤다. 이놈은 분명 흔해 빠진 원숭이가 아니었다. 고함 소리가 정말 멋진 놈이었다. 고함 소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잠깐이나마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 머릿속엔 모두 타임머신이 한 대씩 있다. 그리고 작동법만 잘 알게 되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아직 대낮이었고 햇살은 눈부셨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다. 대낮에 이런 고독감도 오랜만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밀림지대를 여행하고 있든, 서울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있든, 어디에 있어도 마음이 공허하긴 마찬가지였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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