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선배님. 요즘 운동권은 엔엘 피디 모두 기승전박으로 통일한 것 같습니다.”

“기승전박이라. 무슨 뜻이죠?”

“무얼 하든지 박근혜 퇴진으로 결론 내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말 퇴진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외치는 겁니까?”

“의지와 능력이 있기는요. 이쑤시개로 악어 잡겠다고 폼만 잡는 거죠.”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그런 구호를 왜 그리 열심히 외치죠?”

“운동권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개량주의 아닙니까. 자신이 개량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방편이죠. 일종의 알리바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개량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알리바이라! 문득 씁쓸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 몇 년 사이 내 이름 석 자 위에도 숱한 개량주의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난 초지일관 자민통이요. 자민통을 부정하는 당신은 개량주의자임에 틀림없소.”

그래서 눈을 씻고 유심히 살펴봤다. 자민통, 즉 자주·민주·통일을 신념으로 삼는다면 자주 대 예속 구도를 형성하고 대중을 그리로 결집시키기 위한 투쟁을 모든 실천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이는 자민통 인사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난 변함없이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소.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당신이야말로 틀림없는 개량주의자요.”

그래서 눈을 씻고 유심히 살펴봤다. 무릇 사회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다면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대중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주의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혹자는 국가보안법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거 혁명가들은 국가보안법이 없어서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것인가.

우리의 꿈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변혁운동이라 부르든, 달리 부르든 별 상관은 없다. 세상을 바꾸자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수과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네 가지 정도를 짚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전략적 승리를 보장할 양자 구도를 형성해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전선’을 잘 쳐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구도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주도로 만들어진 좌우 구도다. 좌우 구도에서 좌파는 대중의 절대적 지지 아래 우파를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득권 세력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다. 진보운동 입장에서 좌우 구도는 필패 구도다. 과거 민주 대 독재 구도처럼 기득권 세력의 정체를 폭로하고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양자 구도를 짜야 한다.

둘째. 실질적인 집권 플랜을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에서 집권 플랜의 핵심은 대선주자를 키우는 것이다. 현재 진보운동 진영 안에서 이에 대한 계획은 부재하거나 불투명하다. 얼마 전 정의당 대표 경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당의 집권의지를 과시하는 방안으로 예비내각 구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선주자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비내각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셋째.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핵심 동력을 구축해야 한다. 얼마 전 운동권 인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여전히 민주노총을 핵심 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대부분 "그렇게 않겠습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기업 정규직이 주축인 민주노총은 현상유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현상유지에 집착하는 조직을 핵심 동력으로 사고하다니! 비판적 사고능력이 마비된 것 아닌가.

넷째, 포괄적인 사회변혁 전망 속에서 개별 이슈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갖고 이야기해 보자. 현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이슈화됨에 따라 정규직은 지금의 자리를 지켜야 할 그 무엇으로 사고하면서 더욱 보수화되고 있다. 더불어 정규직이 은연중에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사고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분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노무관리에 필요한 최상의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비정규직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기존 틀 안에 갇힌 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서면서 나타난 역설적 결과다.

네 가지 과제의 해답을 찾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해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단초 정도는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채로 실천적 뒷받침 없이 결과를 책임지지도 않는 언사를 늘어놓는다면 그야말로 개량주의자라는 비난을 모면하게 위해 쏟아 내는 알리바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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