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정부가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들을 편집해 청년 이름을 붙인 고용대책을 발표하는 것은 이제 연례행사가 됐다. 남은 임기 내에 20만개 이상의 청년 일자리 ‘기회’를 창출한다고 한다. 고용률 개선 효과는 확실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기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도망갈 틈을 미리 만들어 뒀다.

20만개 중에 청년인턴, 직업훈련, 일·학습병행제와 같이 경력형성과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임시적인 기회(?)가 12만5천개다. 전체의 62.5%에 달하는데 사업 참여 이후에 지속가능한 진짜 취업으로 이어 갈 대책이 없다. 노동시장으로의 ‘더 좋은 이행’이 보장되지 않은 직업능력개발사업은 출구 없는 ‘전시행정’의 전형이다.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숙련 수준이 낮고 경력이 짧은 상태로 노동시장에 최초로 진입하는 청년은 비용절감의 첫 번째 순위다. 대기업은 신규채용을 계속 줄이고, 그마저도 경력직을 선호한다. 비정규직이면 더욱 좋다. 훈련에 대한 추가 비용을 아껴 바로 현장에 투입하고, 쉽게 해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청년은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하고, 양질의 일자리는 행운을 가진 몇몇 소수의 것으로 국한되며, 남은 자리를 향한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청년에게 요구되는 것들은 많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가 내놓고 있는 대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능력중심 사회’다. 노동시장이 ‘능력’이라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의해 작동하면 수많은 불균형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 이상으로 보상받거나 보호되고 있는 자들이 큰 문제다. 이른바 ‘과보호’되고 있다는 노동자들 말이다.

능력.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다. 일·학습병행제와 같은 직업능력개발제도가 강조되는 것 또한 ‘능력중심 이데올로기’의 표출이다.

상식적으로 ‘능력중심’이라는 가치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의 ‘능력’이 현실의 불평등한 노사관계에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높이는 무기가 되지 못하고, 사용자가 전가의 보도처럼 마음껏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차별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직무능력에 따라 보상하는 임금체계, 정규직이어도 성과가 낮은 자는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퇴출제도, 자격과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채용제도,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같은 표준화된 자격제도, 산업수요에 부합하는 교육훈련제도와 대학 구조조정은 모두 하나의 원리에 의해 구성된 종합선물세트다. 그것의 일관된 핵심원리는 ‘능력에 따른 합리적 차별’이다. 노동시장의 불평등이 엄연한 조건에서 ‘직업능력 중심의 사회’는 결국 능력이라는 기준을 적용해 차별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능력중심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에 따른 결과다. 그러한 관점은 청년실업의 원인도 노동수요 측면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동공급 측면에서 청년들이 산업이 원하는 만큼 훈련되지 않은 것에서 찾는다. 청년들이 대학 나와 봐야 할 줄 아는 일은 없고 눈높이만 높기 때문에 실업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인문계열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소프트웨어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자는 발상이 나오는 이유다. 이제 청년구직자들은 대학졸업장과 토익점수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턴경력·직무능력·국가자격까지 갖춰야 한다. 청년에게 강요되는 ‘자기책임론’의 주문 속에 청년은 이중삼중의 고통에 빠지고 있다.

이는 교육훈련에 대한 비용 분담의 문제이기도 하다. 외환위기 이전 고속성장 시대의 고용체제에서는 기업이 청년을 정규직으로 채용해 교육훈련 비용을 기꺼이 지불했다. 그 시대 청년들은 안정된 고용 속에 정년을 보장받으며 신입사원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키우고 그만큼의 승진과 임금인상으로 보상받았다. 이것이 오늘날 비효율적 제도의 대명사로 공격받고 있는 ‘연공서열식 임금·고용체계’의 작동 원리다.

그러나 이제는 기업들이 청년에 대한 교육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그것을 개인과 사회에게로 전가한다. 기업은 모든 것이 준비된 청년만을 원하고, 공공정책은 그런 기업의 요구에 맞춰 직업능력개발제도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산업수요에 적합한 인재를 육성’한다. 청년의 숙련과정에 들어가는 교육훈련 비용에 대해 개인·기업·정부 사이의 적절한 비용분담의 원칙을 다시 제기해야 할 시점이다.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1차 분배시장에서부터 ‘임금’과 ‘고용’의 몫을 정당하게 되찾지 않으면 아무리 큰돈을 쏟아부어서 청년들을 훈련시켜도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 청년들은 능력이 부족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scottnearing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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