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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 끝에 물폭탄 '한국노총 천막농성장'] 하루의 끄트머리는 조합원과 함께 "노동개악 저지" 한목소리김동만 위원장 "'킬러 토픽' 걷어내면 대화 안할 이유 있나" … 국회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 요구도
▲ 노동시장 구조개악 분쇄를 위한 한국노총 천막농성 12일차인 지난 24일 김동만 위원장을 비롯한 총연맹 간부들이 여의도 산업은행 옆 천막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심상정 정의당 신임 대표가 이날 농성천막을 찾아와 김동만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비 한 번 억수로 오네."

전국이 태풍 영향권에 들어선 지난 24일 오전. 조기두 한국노총 조직강화처장이 천막 위에 고인 물을 한 쪽으로 몰아 쏟아 내며 말했다. 이날로 12째를 맞은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 한국노총 천막농성장에도 빗줄기가 들이쳤다. 몽골식 천막을 지탱하고 있는 성인남자 손목 정도 두께의 철제 뼈대는 웬만한 태풍에도 끄떡없어 보였지만, 천으로 된 지붕 앞머리 부분은 빗물이 고이면서 금새 밑으로 처지곤 했다.

천막 안에선 선풍기 다섯 대가 돌고 있었다. 선풍기들이 고군분투하며 모터를 돌려댔지만 눅눅하고 습한 기운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뙤약볕보다 비가 훨씬 낫다는 게 농성자들의 중론이었다. 정문주 정책본부장은 "해가 나는 날에는 아스팔트 열기가 올라오고, (바닥에 깐) 은박지에 빛이 반사돼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천막 곳곳에는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이 직접 검은색 싸인펜으로 서명한 '방'이 붙었다. "천막농성장은 금연·금주 구역입니다. (위반시 벌금 10만원) 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만"

엄포 덕인지 천막 안팎은 깨끗했다. 가로 세로 5미터 크기의 제법 큰 천막이라 산업은행 앞 인도에 놓여 있던 중간 크기 나무 세 그루까지 품어 안아야만 했다. 한 간부가 천막 안 나무를 가리키면서 "겨울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들려고 준비했다"며 농담했다. "장기전을 준비하는 거냐"는 물음에 이은호 홍보선전본부 국장은 "정부가 독소조항을 빼겠다면야 내일이라도 농성을 접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장기전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지난 4월8일 노사정 협상 결렬을 선언하면서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및 파견대상 업무 확대 △휴일근로의 연장근로 포함 단계적 시행 및 특별추가근로 연장 △임금피크제 의무화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개편 △일반해고 및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 같은 5대 수용불가 사안 철회 없이는 노사정 대화에 복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일반해고·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는 반드시 걷어내야 할 독소조항으로 여기고 있다.

조기두 조직강화처장은 "일반해고·취업규칙은 사용자들이 마음대로 변경하고 싶었지만 근로기준법 때문에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라며 "사용자들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겠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곁에 있던 박대수 상임부위원장이 "도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 것 같냐"고 물었다. 함께 있던 노조 간부들은 침묵으로 응대했다. 노조 간부라면 말하지 않아도 답을 아는 질문이었다.

"작은 힘 보태고 싶어 왔다" 조합원들 방문 이어져

천막농성의 하루는 교대자들이 오는 아침 9시에 시작된다. 남성 간부들은 세 조로 나눠 3일에 한 번씩 24시간씩 농성장을 지키고, 여성 간부들은 야간 당직을 서지 않는 대신 두 조로 나눠 이틀에 한 번씩 돌아간다. 임원들을 포함해 20여명이 매일 천막을 지킨다.

방문객들이 뜸한 오전 시간, 천막 안은 흡사 독서실을 방불케했다. 당직자들은 한국노총 자료실에서 가져다 놓은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로 기사를 검색했다.

농성장 한 쪽에서 장경술 한국노총 인천지역본부 조직국장이 날짜가 지난 22일자 매일노동뉴스 1면 '노동시장 개혁 토끼몰이 맞서 노동계-야당 국회 대화 추진' 기사를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다.

장 국장은 "조합원들이 노동시장 구조개악 이슈에 대해 많이 물어온다"며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예전 기사들을 읽고 또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오전 혼자 농성장을 방문했다.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달려 왔단다.

"사실 그동안 정부에서 뭐 한다고 해도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던 게 다반사였죠. 그런데 노동시장 구조개악은 한 번 물꼬가 터지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후세대들에게 나쁜 근로조건을 물려줄 순 없죠."

독서실같이 조용했던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졌다. 금융노조 우리은행지부 간부 10여명이 지지방문을 왔기 때문이다.

조촐한 간담회가 진행되려는 찰나, 공공연맹 노동부유관기관노조 산업인력공단지부 대의원 50명이 인천에서 임시대의원대회를 마치고 오면서 순식간에 약식 집회가 시작됐다. 손종배 지부 위원장은 "언제든 지침만 내리면 파업에 돌입할 준비가 다 됐다"며 결의를 밝혔고, 류기섭 노동부유관기관노조 위원장은 "청년실업과 같은 고용 문제는 국가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노동조합이나 공공기관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원춘 우리은행지부 위원장은 "농성을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당직자들에게 삼계탕을 '쐈다'.

김동만 위원장 "국회 의지 부족해 보여" 우려도

오후 2시가 되자 김동만 위원장이 농성장에 모습을 보였다. 그새 자란 머리카락이 까슬하게 올라와 있었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지만 유쾌한 농담은 여전했다. 맨발에 반바지 차림의 당직자를 가리키며 "옷차림을 보아하니 장기전이네"라며 웃었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하며 "장기전이 아니라 오늘이라도 정부가 와서 '킬러토픽'을 들어내겠다고 하면 대화를 안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킬러토픽이란 노동자의 고용·근로조건과 직접 관련된 이슈로, 일반해고·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를 의미한다.

김 위원장의 말이 어느새 빨라졌다.

"자꾸 정부가 세대 간 갈등을 유도하고 있는데, 노동계는 지금까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들을 얘기해 왔지 않나. 실질임금은 줄어들겠지만 근로시간단축을 통해 노동자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반면 자본의 욕심은 한이 없다. 30대 기업 사내유보금을 봐라. 자그만치 710조원이다. 710조원. 1년 새 38조원이 늘었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일자리 창출은 안 하고 뭘했나."

한국노총은 이날 국회에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논의기구 설치를 요청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논의기구 설치 가능성을 비롯해 실효성 여부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대화기구 구성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사정소위 가동 때는 신계륜 (전 환경노동)위원장이나 (새누리당)김성태, (새정치민주연합)홍영표 간사 모두 의기투합해 '한 번 해보자'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양측 생각에도 차이가 있고, 그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은 '새누리당 노동시장선진화특별위원회'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겠다는 건지, 27일 기자회견 발표 내용을 한 번 봐야겠다"며 평가를 미뤘다. 큰 기대는 안 하는 눈치였다.

오후 3시.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취임 후 인사를 하기 위해 농성장을 방문했다. 심 대표는 "천막에 와서 기 받아갔더니 당선됐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대단하다"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심 대표는 "(천막에 오기 전에) 김무성 대표를 만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안 된다. 국회에 논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며 "노동시장 개혁에 노동자 입장이 많이 반영되려면 아무래도 정당들의 엄호 하에 얘기하는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작년처럼 환노위 내에 만들면 힘을 못받을 것 같다"며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환노위를 넘어서는 대화체를 꾸려야 한다는 요구였다. 심 대표는 "노동문제는 정면으로 논쟁하고 키울수록 (노동계에) 명분이 있다"며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천막을 떠났다.

퇴근시간 무렵이 되자 자동차노련·광산노련·담배인삼노조 조합원 60여명이 찾아 왔다. 천막농성장 하루의 끄트머리도 역시 조합원들과 함께다.

강병도 자동차노련 사무처장은 "요즘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서울시내 어디가도 밥 한끼 제대로 먹을 수 없다"며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임금만 매년 제자리다. 정부는 그것도 많다고 노동개악을 하겠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 사무처장은 한국노총 사무총국 간부들을 향해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도 창대하게 마무리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강 사무처장은 "지켜보고 있을테니 스리슬쩍 넘어가지 말라"며 "한국노총은 우리를 믿고 열심히 투쟁해 꼭 승리해 주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사정위 곧 복귀" 오보에 한때 천막농성장 '술렁'


태풍 '할롤라' 영향을 받아 중부지방에 물폭탄이 떨어진 이날 한국노총 농성장은 아침부터 때아닌 문자폭탄, 전화폭탄으로 술렁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핵심쟁점 절충, 한국노총 노사정위 곧 복귀' 제목의 기사 때문이었다. 핵심쟁점이었던 취업규칙·일반해고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와 관련해 노사정이 한 발씩 양보해, 한국노총이 협상 복귀시점을 두고 저울질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당직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톡'으로 진위를 묻는 사람들의 문자가 봇물을 이뤘다. 이은호 홍보선전본부 국장은 "기사에 난 대로 다음주나 8월 초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열려면 오늘이라도 소집 공문을 보내야 한다"며 "듣도 보고 못한 얘기"라고 헛웃음을 지었다.

기자들의 전화 폭탄을 받은 강훈중 한국노총 홍보본부장은 "오보"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 같은 핵심이 폐기되지 않는 한 노사정위에서 복귀할 수 없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병균 사무총장은 "어제(23일) 집회에서 한국노총이 '정부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면 대화할 수 있다'고 했더니 여기저기 숟가락 얹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장이 설 것 같으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기사도 나온 것 같다는 얘기다. 박대수 상임부위원장은 "정부가 자기들 희망사항을 얘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오전 내내 지인들에게 "오보"라는 문자를 보냈다는 김순희 여성본부장은 "공익위원들이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데 노사정위에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냐"며 "노사정위 복귀는 안될 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날 오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보도자료가 나왔다.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정의당과 김영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에게 국회에 사회적 논의기구를 설치하자는 제안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라는 핵심 쟁점에서 노사정이 한 발 씩 양보는커녕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보도자료였다.

배혜정  bhj@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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