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81년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한 바로 다음 해였다. 청년은 본디 농촌 출신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 출세하겠다는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시대 상황은 청년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결국 청년은 학생운동 한 복판에 뛰어들고 말았다. 1984년 6월22일 청년은 학생운동을 마무리하는 의식으로서 가두시위를 주도했다.

6월에 접어들어 대구로부터 시작된 택시 파업이 일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요즘과 같은 전국적인 노조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청년은 택시 기사들의 총파업에 어떤 형태로든지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방법은 파업투쟁을 지지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 당시 모든 가두시위가 그러했듯이 불법 가두시위였다.

당시는 기습 가두시위가 빈번하다 보니까 경찰도 시내 주요 도심에는 경찰을 상시 배치하고 있던 중이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도리 없이 청년은 시간대를 바꾸기로 했다. 통상적으로 가두시위는 퇴근시간대에 맞춰 저녁 시간에 진행됐는데 이번에는 출근 시간에 맞춰 아침 시간에 진행하기로 했다. 장소는 서울 영등포로 정하고 사전 답사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거리에 배치돼 있던 전투경찰이 정각 8시에 교대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곧바로 동원 지침이 하달됐다. 6월22일 아침 8시 정각 청년은 호각을 불었다. 일시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대열을 형성했다. 신속하게 도로를 점령하고 유인물을 살포하며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행진해 갔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시위 학생들은 양평동 로터리 쪽으로 행진해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 영등포경찰서가 있었기 때문에 진압 경찰이 투입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결국 시위 학생들은 양평동 로터리에 도착해 정리 집회 후 해산했다. 단 한 명의 연행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청년과 후배들은 승리감에 도취돼 곧바로 구로공단 전철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막걸리 집을 찾았다. 일행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었다. 혹시 ‘짭새’(사복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순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뒤 아저씨 중 한 명이 택시 관련 이슈 중 하나를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청년으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인데 다행히 후배 한 명이 명쾌하게 답변을 했다. 그러자 아저씨들은 일순간에 표정이 밝아지면서 자신들은 택시 기사임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택시 기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학생들이 택시 기사 총파업을 지지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하자 택시 기사들은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해서 다른 기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특별히 사전에 논의된 바가 없었는데도 수많은 택시 기사들이 다투어서 영등포로 집결했다. 많은 경우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리게 한 다음 달려왔다.

이렇게 해서 몰려든 택시 기사들은 학생 시위대 후미를 수백 겹으로 에워쌌다. 그럼으로써 진압 경찰의 접근을 차단했다. 경찰 차량이 비키라고 난리쳤지만 이들은 요지부동으로 시위대를 엄호했다. 전혀 눈치를 채지를 못했었지만 그 덕분에 학생들은 안전하게 기습 시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택시 기사들은 이야기를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학생들의 술값과 식사비를 모두 계산하고 막걸리 몇 통을 추가로 안겨다 주었다. 모두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날의 경험은 청년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청년은 민중 속의 삶을 선택했고 줄곧 그 길을 걸어갔다. 어느덧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청년은 머리가 희끗한 50대 중반의 중년이 됐다. 그는 현재 진보의 새로운 미래를 탐색하며 이 칼럼을 쓰고 있다.

지금 나는 오랜 성찰과 탐색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다시금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행이도 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꿈꾸어 왔던 진보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퍼즐이 완성돼 간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역시 답은 사람 속에 있었다. 그런데 아직 중요한 하나의 전제를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1984년 영등포 시위에서와 같은 민중과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제대로 된 무대 복귀를 위해 치러야 할 통과의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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