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벌써 17년 전 일이다. 1998년 나는 지역 촌놈으로 맴돌다 어느 유력 연합단체 중앙간부로 진출하게 됐다. 그곳에는 여러 해 전부터 간부직을 맡고 있던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중 한 명과 술자리를 갖던 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소셜리스트’가 아니라 ‘코뮤니스트’라는 것이다. 대단한(?) 진보주의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맙소사! 그는 얼마 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던 여당(흔히 사람들은 그 당을 민주당이라 불렀다.)으로 자리를 옮겼다.

관념의 세계 속에서 진보를 표방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시대가 준 과제를 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진보는 말장난이거나 심하게는 속임수에 불과할 수 있다. 과연 이 시대 진보의 리트머스 시험지는 무엇일까.

하나.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여진이 계속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신자유주의 반대만을 외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원론적 수준이라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의 좌표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는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것만으로도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복지국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더 이상 쟁점이 아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를 둘러싼 논쟁 구도도 크게 희석됐다. 복지를 위한 증세 여부도 마찬가지다. 쟁점은 복지국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사회경제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꿔야 하며 거꾸로 복지가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서 어떤 기제로 작동해야 하는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대중 의식 속에는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관념이 싹을 틔우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것의 목적이고 중심이며 권력의 원천을 이루면서 시장과 돈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사람 중심의 사회’다.

둘. 2017년 대선에서 민주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국민의 마음을 모아 낼 수 있는 정치조직이나 정치 지도자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에도 쉽게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201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의 40% 정도가 17대와 18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게 나타났다. 각종 경제지표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성적표는 민주정부 10년 때의 그것보다도 못하다.

현재 한국경제는 틀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미래를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낡은 질서에 결박돼 생산성이 저하되면서 빠르게 국제경쟁력을 잃어 가고 있다.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기존 틀 안에서 맴돌며 아까운 시간과 돈을 까먹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주류사회 안에서조차 마냥 이렇게 가다가는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심리적 동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권교체를 실현하자면 정치 프레임도 함께 바꿔야 할 것이다. 소모적 대결만을 반복하는 진영논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공통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타협과 협력의 정치를 선보여야 한다. 초당적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 프레임을 온전히 체화한 대선후보를 만들어 가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진용을 갖춰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진보적 국민정당’의 토대도 구축될 것이다.

셋. 청년세대의 광범위한 정치적 진출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모든 영역에서 지금 우리는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음을 직감할 것이다. 사회경제 틀이든 정치 프레임이든 기성의 낡은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성공의 신화에 도취해 있는 기성세대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 과거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청년세대다. 청년세대 조직화가 시급한 이유다. 더욱이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의 집중적 희생양으로 전락하면서 정치적 변화를 그 누구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그들 안에서 한국 사회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 낼 정치적 에너지가 풍부하게 축적돼 가고 있다.

모든 문제 해결은 과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 앞에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세 가지 과제가 던져졌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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