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
칼럼니스트 겸 작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일이다. 그때 난 W잡지 피처팀의 막내 기자였다. 그런데 무슨 막내에게 기사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많이 준단 말인가. 그때 혹시 내가 일을 좀 잘 했던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잘한다, 잘한다 해서 더 잘하고 싶은 칭찬병에 걸려 있었다. 한 달이면 무려 18~20꼭지씩 해치우던 때였는데, 남들보다 더 빨리, 그것도 잘 쓴다는 칭찬이 듣고 싶었던 나머지 영화 기사를 쓰면서 당시 영화 마니아들이 즐겨 보던 잡지 <키노> 기사의 일부분을 그대로 베껴 쓰는 우를 범했다.

그런데 들켰다. 콩알만한 매의 눈을 장착한 채 편집부 기자들의 동향을 주의주시하던 편집장 S에게 들키고 말았다. 편집장이 내 원고와 내가 책상 아래 감춰 둔 <키노>의 어떤 페이지를 펼쳐 놓고 노려보는 가운데 나는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잘못했습니다.” 콧물이 같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울었다. 그만큼 내 죄가 부끄러웠고, 그 죄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서 무너지는 하늘 아래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과오는 고백으로 반쯤 용서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건 뭐지. ‘메르스’ 키워드를 주춤거리게 할 정도로 겁나게 확산된 ‘신경숙 표절’ 사건 말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표절(그것도 매우 의도적으로 읽히는)을 두고 처음엔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논란이 눈사태처럼 커지니 이제 와서 ‘표절 지적이 맞겠다’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표절했다는 말인가. 안 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여전히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하셨다. 나? 문학적 언어유희도 이 정도면 병이 아닌가 싶었다. 알코올성 치매.

어떤 작가든 표절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들도 인간이니까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훌륭한 책들을 직업적으로 끼고 사는 사람들인가. 좋아하면 닮고 싶고, 닮고 싶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모방할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심지어 보르헤스(<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나 발터 벤야민(<아케이드 프로젝트>)이 그렇듯 남의 책을 통째로 베끼거나 짜깁기하는 식으로도 독창적일뿐더러 훌륭한 저작물을 만들 수 있다. 그 때문에 어떤 유명 작가는 후배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책을 베껴 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신경숙 같은 거목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선배들의 위대한 유산을 모방해도 좋으니 열심히 읽고 써라는 식의 독무가 필요한 애송이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포지션이다. 정확히 포지션에 따른 의도. 그리고 표절한 후에, 아니 표절이 들통한 후의 태도가 그 다음 문제고.

신경숙 같은 경우 <엄마를 부탁해> 1권만 놓고 봐도 무려 20억원의 인세를 챙길 수 있는 작가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유일할지도 모르는 작가. 그 때문에 표절해도 문단의 비호를 받는 작가. 명백한 자기 과오라 해도 사과하고 반성하기는 커녕 유체이탈적 화법으로 애매하게 ‘신경질’을 부릴 만큼 뻔뻔해진 최고 권력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그분과 닮은 그 태도. 그래서 더 용서해 주기가 싫었던 것일까.

그런 점에서 신경숙이 일종의 희생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뭐랄까, 메르스 광풍에 꽂힌 눈과 귀를 잠시나마 막아 줄 또 다른 대체물이 필요했달까. 이제 와 다시금 불타는 한국 문단의 표절 시비 연대기를 들춰 보면 그보다 더한 표절 논란도 있었다. 예컨대 중견 소설가 조경란과 신인 작가 주이란의 <혀>의 표절 시비. 대담하게 제목이 같을뿐더러 주제·소재·결말, 사건의 구성과 전개 과정, 등장인물의 성격, 배경, 문체와 뉘앙스, 일부 문장의 내용 등이 유사한 두 작품. 도대체 누가 누구를 베낀 것일까. "조경란이 자신의 단편소설 <혀>를 동아일보 2007년 신춘문예 심사 과정에서 읽고 장편소설 <혀>로 집필했다"는 주이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조경란은 왜 처음에 심사한 적 없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난 아직도 그게 궁금하다.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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