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뭉크 <침대와 시계 사이에 서있는 자화상>, 1940~43년,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 미술관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한눈에 보기에도 쇠약한 노인이 시계와 침대 사이 좁은 공간에 서 있다. 노인의 왼쪽엔 ‘현재’를 상징하는 시계가 있고, 오른쪽에는 인간이 죽는 공간인 침대가 보인다. 그 현세와 죽음의 경계 사이에, 곱게 잘 차려입은 노인이 꼿꼿하게 서 있다. 두 손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고 고개를 조금 위로 쳐든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런데 노인의 키보다 더 커 보이는 시계는 마치 벽에 세워진 관처럼 보인다. 외출준비를 다 끝냈다는 듯 오른쪽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돼 있고 바닥도 반들반들 윤이 난다.

이 노인의 이름은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뭉크 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노란빛 밝은 공간은 아마 그의 아틀리에일 것이다. 아틀리에 벽에 빼곡하게 걸린 그림들이 증언하는 창작의 시간은 이제 그의 뒤편에 있다. 그는 이제 죽음과 정식으로 만날 채비를 끝낸 것이다. 뭉크는 말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미술이라는 여신에게 충실했고, 그녀는 나에게 충실했다. (…) 태어난 순간에 이미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이제 죽음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탄생이 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세상이 우릴 떠날 뿐…. 내 부패한 육신에서 꽃들이 자랄 테고, 난 만발한 꽃들 속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 죽음은 삶의 시작이요, 새로운 결정체의 기원이다.”

어찌 보면 뭉크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다. 왜냐하면 사실 그의 생애 대부분은 죽음에의 공포와 그로 인한 불안으로 점철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노르웨이 뢰텐에서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유독 병약했다. 어린 시절부터 류머티즘에 의한 고열과 만성 기관지천식은 늘 그를 괴롭혔다. 훗날 뭉크가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질병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폐결핵 균은 흰 손수건에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핏빛 깃발을 꽂았다”라고 진저리치듯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년기부터 정작 그를 가장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위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련의 죽음과 그 체험에서 비롯된 충격의 무게가 그를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렸다.

뭉크가 고작 5살밖에 안 됐을 때인 1868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은 사실 자체만으로도 5살 아이는 세상의 무게에 허우적거렸지만, 아버지는 그 무게를 덜어 주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분열로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하면서 종교적으로 집착하는 증상을 보였다. 당연히 집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뭉크는 이 숨 막히는 광기를 피해, 한 살 위의 누나 소피에(sophie)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소피에는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하던 이모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던, 의젓한 누나였기 때문이다. 뭉크의 ‘소울 메이트’이자 ‘제2의 어머니’, 그가 소피에였다. 그런데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폐결핵이 몇 년 후 다시 뭉크의 집을 찾아왔다. 이번 희생자는 처음엔 뭉크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피를 토해 내던 뭉크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대신 폐결핵을 떠안은 주인공은 바로 소피에가 됐다. 신은 잔인하게도 뭉크에게서 어머니에 이어, 누나마저 앗아 간 것이다. 그때 뭉크의 나이는 고작 15살이었다. 이때 뭉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처럼 뭉크의 유년시절을 가득 채운 질병과 그로 인한 죽음의 공포는, 뭉크가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항상 되돌아갔던 ‘불행했던 기억’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뭉크는 자신의 숨을 거두는 데 몇 번이나 실패한 죽음이 설욕하듯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곁에는 공포와 슬픔과 죽음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놀 때도 나를 따라다녔다. 어디에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봄날의 햇살 속에서도, 여름날의 찬란한 햇볕 속에서도 그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을 때면, 그들은 내 곁에서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저주로 나를 위협했다. 난 종종 한밤중에 깨어나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인 채 방을 둘러봤다. 내가 있는 곳은 지옥이었다.”

그의 불안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1895년 남동생 안드레아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렴으로 사망한 데 이어, 1898년에는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친척 중 누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되면 근심에 싸였다. “우리 가족에게는 병과 죽음밖에 없네. 그게 우리 핏속에 있어.”

그러나 그는 계속 살아남았다. 평생을 괴롭히던 기관지염과 천식도 매번 뛰어넘었고, 1918년에는 전 세계를 돌며 숱한 사상자를 냈던 스페인 독감에도 덜컥 걸렸지만 끝내 이겨 냈다. 심지어 1908년 알코올 중독과 신경쇠약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9개월 동안 입원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절규>를 창작한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처럼 젊은 나이에 자살해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지만, 뭉크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80세 생일까지 치렀다. 뭉크 자신조차 의외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는 ‘유명한 노인’이 됐다. 누구나 그의 노년은 화려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화가였고, 그에 비례해 명성도 높아져 1912년 독일 쾰른에서 개최된 대전람회에서는 세잔·고흐·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당될 정도로 이미 ‘대가’였던 뭉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뭉크는 어느 날 갑자기 ‘퇴폐미술가’가 됐다. 1937년 나치는 많은 현대 미술품을 퇴폐미술로 분류하고 독일 미술관과 화랑으로부터 강제로 축출했는데, 이 중 뭉크의 작품은 무려 82점이나 포함됐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1940년 4월9일에는 독일이 마침내 뭉크의 고국인 노르웨이까지 침공했다. 이젠 뭉크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까지 강제로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불명예스러운 ‘퇴폐미술가’라는 꼬리표를 단 노인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죽음의 손길이 뭉크를 찾아왔다. 1944년 1월19일 일요일, 독일 함선 한 척이 오슬로 필립스타 부두에서 폭파되면서 부두에 있던 수톤의 폭약에 불이 붙은 사건이 일어났다. 대폭발이 일어났고, 오슬로는 화염에 휩싸였다. 얼마나 폭발의 위력이 셌던지 항구 근처 빌딩 여러 채가 파괴될 정도였고, 그 진동으로 뭉크가 살고 있는 오슬로 외곽도시 에켈리에서도 창문이 부서졌다. 가정부는 불안에 휩싸여 그에게 지하실로 대피하라고 권했지만, 뭉크는 기어코 실내가운을 입고 지하실로 연결되는 계단에 앉아 불기둥이 치솟는 세상을 봤다. 그에 멈추지 않고 뭉크는 집 밖으로 나갔다. 이때 그가 본 것은 전쟁과 광기로 뒤덮인, 당장 내일 세상을 뜬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는 ‘미친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 산책은 뭉크를 ‘미친 세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도와줬다. 산책 도중 뭉크는 감기에 걸렸고, 그 후 기관지염과 폐렴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944년 1월23일, 마침내 뭉크는 폐렴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뭉크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다고 한다. 당시 세상은 ‘악령’이 지배하는 곳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뭉크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의 손길을 아마도 쉽게 허락했을 것 같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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