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축구평론가

불안과 위험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현대적 삶에서 재난과 사고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이를 미리 예방하는 것, 그리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처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인 구난작업을 하는 한편 그 사태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들을 끝까지 치유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국가는 이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들에게 그 원인과 책임까지 전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재연되는 책임 회피, 그들의 거짓말

1755년 11월1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지진해일에 강타당했다. 지진의 진원점은 3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대서양 카보 베르데섬 인근 해저였다. 그로부터 40여분 후 거대한 해일이 리스본을 휩쓸었다. 화재까지 발생해 무려 닷새 동안 도시가 불에 탔다. 인구 27만여명 중 6만명에서 9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재난이 닥쳤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 포르투갈 왕정과 가톨릭 지배계층은 ‘시민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몰아세웠다. 그렇게 해야 그들의 빈약했던 사후 수습이 면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가 신앙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태도가 문제라며 질타했고 폼발 후작이 착실히 도시 재건작업을 추진해 오늘날의 리스본으로 도약하게 됐지만, 사태 초기에 그들은 불안에 쫓기고 불만에 사로잡힌 시민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데 골몰했다.

이러한 양상이 현대사회 곳곳에서 재연된다는 게 비극이다. 지난해 8월 방한했던 영국의 알렉스 캘리니코스 런던대 킹스칼리지 교수(유럽학)는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적 탈규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최대한 많은 인원과 화물을 배에 태우고 실으려 한 것이다. 구출에 실패한 무능한 국가의 문제, 안전관리 규정과 운항규정을 눈감아 준 해운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1989년 영국에서 발생한 ‘힐스보로 참사’를 예로 들었다. “경기장에서 96명이 사망했다. 책임 있는 경찰은 발뺌했고, 한국과 비슷하게 영국에서도 우파 여성 정치인인 대처가 지도자였다. 대처는 그로부터 몇 년 전 그 지역 광부들의 파업을 분쇄하는 데 공로를 세운 경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는 힐스보로 사건 전말을 은폐했다. 리버풀 출신 유가족들은 지난 25년 동안 끊임없는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고 이제야 정부의 은폐공작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팬들의 열기 담지 못한 낡은 경기장

자, 이제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 살펴보자. 89년 4월15일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FA컵 준결승전이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벌어진다. 이 경기장은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이다. 셰필드 웬즈데이는, 유서 깊은 영국의 명문 클럽 중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구단 중 하나다. 무려 1867년에 창단된 팀이다. 같은 지역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밀려 주로 2부 리그에서 뛰고 있지만 이 두 팀이 100여년 넘게 벌인 강철 더비(셰필드 지역은 16세기부터 철강산업이 발달했다)는 그 어떤 더비(지역 라이벌전)보다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강철의 도시였지만, 아쉽게도 1980년대의 영국은 여러모로 불안정했고 낡고 오래된 경기장을 안전하게 보수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니, 행정력과 경찰력은 그런 것보다는 축구장 열기가 거리의 시위로 번지는 것을 막는 데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다름 아닌 마거릿 대처 시절이었다. 대처 수상은 시위를 하는 노동자와 축구장에서 고함을 치는 팬들을 한데 묶어 ‘문명의 수치’라고 몰아세웠던 정치인이다.

이윽고 운명의 경기시간이 다가왔다. 노후한 힐스보로 경기장은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열혈팬들을 온전히 수용하기 어려웠다. 특히 리버풀의 열혈팬들이 대거 참가한 상태였다. 결국 경기장 한쪽(레인 테라스)이 붕괴되면서 무려 96명의 리버풀 팬들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경기는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경기장은 어떠한 안전검사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셰필드의 팬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부 당국에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매번 무시당했다. 끔찍한 사고 이후 사법당국은 난동을 부린 리버풀 팬들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쪽으로 결론지었다. 축구장의 광팬들을 제압함으로써 거리의 시위까지 제압하는 정치선전 작전을 구사해 온 대처 정부는 훌리건들의 안전불감증 탓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희생자에게 훌리건 오명 씌운 마거릿 대처

안전사고 예방과 대처에 현장 책임이 있는 경찰들은 이를 피하고자 사망자들의 혐의를 강조하거나 조작했다. 그들은 사망자들의 혈중 알코올 농도와 범죄 이력을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진실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팬들에게 경찰과 이 지역 국회의원 어빈 패트닉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광적인 팬들이 참사의 원인이라는 법원 판결에 항의해 유가족과 팬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항의하고 재조사 요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누가 축구 보러 가랬어?” 하는 비아냥이 미디어를 장악했고 황색저널 ‘더 선’(The Sun) 같은 곳에서는 노골적으로 리버풀 팬들을 조롱하는 기사와 사진을 게재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는데 축구팬들만 비정상이었다는 것이다. 축구팬들이 술을 마신 채 입장해 장내 질서를 어지럽히고 소란을 일으키다가 그만 붕괴사고와 압사사고를 일으켰다는 쪽으로 그들은 방향을 잡았다. 대처의 집권 보수당은 이 사태의 책임을 리버풀 팬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선전 효과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사고 후 8년이 지난 97년 재조사가 진행됐지만 이렇다 할 새로운 내용을 밝혀내지 못했다. 주요 문서는 접근 금지였다.

참사 발생 20년이 지난 2009년이 돼서야 유가족들이 독립적인 조사권한을 부여받아 ‘힐스보로 독립 패널’을 결성해 재조사를 하게 된다. 이 단체는 정보공개 청구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경찰이 조금이라도 신속하고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최대 41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점까지 밝혀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찰은 현장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무려 160여명의 증인 진술을 날조했다. 어린이 피해자까지 혈중 알코올 검사를 강행했고 또 그 결과를 조작해 발표했다.

결국 2012년 10월 영국 경찰은 경찰독립감시위원회(IPCC)를 통해 이 참사를 전면적으로 재조사했다. 무려 1천500명에 가까운 전·현직 경찰관이 조사를 받았다. 160여건의 허위진술과 55건의 위증까지 낱낱이 드러났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사과했다. 비운의 참사, 진실이 밝혀지는 데 걸린 오랜 시간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끔찍한 명예훼손과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 등에 대해 캐머런 총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23년이 걸렸다.

다시 캘리니코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리버풀 유가족들은 지난 25년 동안 끊임없는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고 이제야 정부의 은폐공작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지기 시작했고,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진실을 요구하는 투쟁을 한다면 정의를 쟁취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점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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