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최저임금을 놓고 진통이 한창이다.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거대한 경합장 아니던가. 어찌 진통이 없겠냐만은 사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싶기도 하다.

결국 노와 사는 엄청난 시각차를 나타내며 평행선을 달리다가 어느 한편이 협상장에서 퇴장하고, 공익위원들이 정부 의중을 타진하다가 노사 모두로부터 실망스럽다는 평을 듣는 결정을 내리곤 하던 게 익숙한 관행이다.

올해 논의는 뭔가 다를 수 있을까. 기존 정규직 중심 조합원 체제를 지니고 있는 양대 노총을 대신해 청년유니온이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같은 새로운 주체들이 논의의 장에 초대받게 됐다는데, 그 효과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최저임금 1만원 요구나 소득 주도 경제성장론의 부상 등 임금인상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긴 하나, 그런 믿음과 주장에 동의하는 국민은 어느 정도나 될 것이며, 그것이 올해 최저임금 협상에서 새롭게 받아들여질 여지는 얼마나 될까.

이러한 가운데 최근 일각에서 “누가 최저임금제를 결정하는가”에 대한 성찰적 문제제기를 하고 나서는 모습이 보여 흥미롭다. 최저임금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결정과정 주체'에 대해 최저임금 적용에 가장 민감하지만 결정과정에서 배제돼 있던 청년층·비정규직들이 발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공익위원들의 대표성을 문제 삼는 모습을 보면서, 제도화된 최저임금 결정기구가 한 세대를 겪으며 그 기능의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최저임금위는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 말기에 만들어졌다. 이는 60년대 초 군사정변 직후 산재보험을 전격적으로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의 끝물에 상대적으로 진보성을 지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아니 친재벌·반노동 권위주의 나라에서 최저임금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설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노·사·공익 합의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다니….

이렇게 형식적으로 사회적 합의 방식으로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국가수준의 노동시장 거버넌스 틀은 이제 한 세대의 역사를 지니게 됐다. 현재 협상이 전개되는 와중에도 캄보디아 대표단이 방문해 그 작동방식을 학습해 가려 할 정도로 제도로서의 외관은 나름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나이 서른이 돼 가는 이 나라의 최저임금 결정기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파트너십에 기초한 협상장으로 기능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캄보디아 같은 나라의 사절단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배워 갈지 궁금하다.

한국 사회 권력관계나 이념적 지형을 고려해 봤을 때, 최저임금위가 갈등적 공방의 장이 되고 그 안에서 합의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발본적인 노력을 했는가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답도 명쾌할 것 같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공감창출을 위한 인식적 인프라가 부재한 것에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본질적인 노력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임금은 원론적으로 물가인상과 생산성 증대를 비롯한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데이터의 공신력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객관적인 데이터는 수집 초기부터 이해당사자들이 동의하는 기준과 절차에 입각해 마련해야 한다. 상대방이 데이터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서로 다른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응당 합의에 이르는 결정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설령 다 같이 인정하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갖춰졌다고 한들 그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복잡한 처지에 있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개별적인 상황을 예외 없이 고려한 형평성을 극대화한 분배공식이란 애당초 형성불가다. 궁극에는 협상을 통한 정치적 조율이 최종 관문에서 진행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결국 이해정치라는, 아주 잘해야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만 있을 뿐 엄밀한 의미의 객관성(objectivity)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라는 말이다. 아무리 과학의 이름을 들먹인들 모두가 동의하는 객관성이 그것을 통해 선험적으로 형성될 수는 없는 법이다. 선험적 객관성을 상정해 지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에는 이미 미셸 푸코의 말대로 권력의지가 내재돼 있을 뿐이다. 진리가 자연스럽게 권위를 형성해야 하지만 실상은 인위적인 권력이 창출해 내는 권위가 진실을 강요하기 십상이다.

어떤 기준이 객관적이라고 인정되며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애초부터 그러한 기준을 만드는 과정에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그들 간에 기본적인 신뢰가 필요하고, 기준 설립자에게도 중립적인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이는 성숙한 민주사회가 아니고서는 여간해선 쉽게 갖추기 어려운 사회적 자본이다.

실제로 의미 있는 최저임금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되려면, 우선 노동하는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준이 무엇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해야 한다.

나아가 그것에 기초해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저임금) 노동력 판매가격이 어느 정도 돼야 그러한 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타당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 참여에 기반해 수긍가능한 공동의 데이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주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 술이 만들어지고 지고 있는 것일진대, 새 부대가 필요해지고 있다. 더 이상 형식에 국한된 합의주의가 갖는 진보성은 큰 의미가 없다. 외형적으로 환골탈태하면서, 내적으로도 튼튼한 인식의 골간을 형성해 가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전개하면서 새로운 최저임금 결정방식의 길을 꿈꿔야 할 때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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