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송경동 시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 지난 11일 오후 이들은 '아싸라비아 창작단' 미술가들이 선물한 각자의 캐리커처를 들고 법원에 들어갔다. 윤성희 기자

지난 11일 오후 버스 한 대가 부산고등법원 앞에 섰다. 부산고법 항소심 선고를 앞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과 송경동 시인,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가 버스에서 내렸다. 30여명의 예술가·인권활동가들도 함께였다.

법원 앞에서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노동자들과 경북 밀양 할머니들이 '연대가 곧 희망'이라는 현수막을 펼쳐 들고 이들을 맞았다. 밀양 주민 한옥순(64)씨는 활짝 웃으며 사람들의 손을 잡았지만, 이내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 3천명이 달라들어 옷 벗은 할매들 끌어내고 죽일라 할 때 희망버스가 우리를 살렸다. 그기 우째 죄란 말이고."

"예술은 사회질서에 균열 내는 것"

박래군 소장을 비롯한 세 명은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희망버스를 기획·주도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지난해 말 1심은 송경동 시인에게 징역 2년을, 나머지 2명에게는 각각 300만원과 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예술가들은 이번 재판을 예술과 사회적 연대에 대한 탄압으로 보고, 항의의 뜻으로 '법보다 예술' 희망버스를 기획했다.

노순택 사진가는 "희망버스는 전례가 없는 자발적 연대운동이자 문화예술적 투쟁이었고, 예술가를 비롯한 탑승자들이 스스로 참여했던 만큼 나름의 책임을 함께 지고자 왔다"고 희망버스를 탄 이유를 설명했다.

송 시인과 10년이 넘도록 친분을 쌓아 온 그는 송 시인을 "송 경거망동" 또는 "송 경고망동"이라고 칭했다. 곧잘 너스레를 떨어 사람들을 웃게 하는 친구로서의 그와 세상 부조리에 맞서 '경고'하는 예술가로서의 그를 비유한 말이다. 노 사진가는 "예술은 한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고, 사회 고통을 말하는 것 또한 그 소임"이라고 말했다.

법으로 가두지 못한 희망

이날 오후 2시 부산고법 301호 법정. 피고인석에 세 명이 섰다. 방청석에 앉은 희망버스 탑승객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형사1부 구남수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1·2차 희망버스가 송씨 주도로 이뤄졌고, 송씨가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한 1심은 옳다"고 밝혔다. 구 판사는 그러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는 사회적 관심이 환기됐던 사안으로 피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다"며 "징역 2년의 실형 선고는 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송 시인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두 사람 벌금형은 1심대로 확정됐다.

방청석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재판 내내 표정이 굳어 있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얼굴도 그제서야 풀렸다. 김 지도위원은 "아쉬운 판결이기는 해도 징역형이 확정됐으면 (미안해서) 잠도 못 자고 방에 난방도 또 못 켰을 것"이라고 웃었다.

선고를 받은 세 명과 탑승객들은 "다행"이라면서도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징역을 면했지만 희망버스에 유죄를 선고한 1심을 그대로 인정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송 시인은 "희망버스는 송경동 개인이 아닌 수많은 시민들의 아름다운 연대운동으로 기억될 것이고, 사법부가 정말 수사해야 하는 것은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서병수 부산시장이나 홍준표 경남도지사"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희망버스 정신대로, 이곳에 모인 분들 모두 생탁·택시 노동자 농성장에 함께 가자"고 당부했다.

박래군 소장은 "희망버스 승차비 통장을 개설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하고, 사문화된 기부금 관련법으로 밀양 송전탑 대책위 활동비 모금을 탄압하고 있다"며 "온갖 방법으로 사회적 연대운동을 탄압하는 이번 판결을 기준으로 추가 사법피해자가 나올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특히 "희망버스는 부당함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로 만들어 낸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가진다"며 "그 정신을 잃지 말자"고 강조했다.

서울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온 송수정 사진기획자는 "시대의 목소리를 듣는 게 예술가의 사명 아니냐"며 "오늘 희망이 필요한 곳에 달려가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그 생각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버스 왔을 때 기분? 이루 말할 수 없지"

희망버스는 두 번째 행선지인 부산시청 앞 전광판으로 향했다. 생탁·택시 노동자들은 전광판 위에서는 고공농성을, 땅에서는 노숙농성을 이날로 57일째 벌이고 있다. 고공농성자 송복남·심정보씨가 가장 먼저 탑승객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웃었다. 탑승객들도 손을 흔들어 호응했다.

최근 고공농성자들은 단식농성을 했다. 경찰이 농성자들에게 올려 보내는 물품을 막았기 때문이다. 한 조합원은 "경찰이 몸 닦는 수건도 현수막으로 쓸 거라며 막고, 컵라면에 물을 부어 올리려고 했더니 물 붓는 것을 허락한 적 없다고 막았다"며 "경찰의 사과를 받은 뒤에야 단식농성을 풀었지만 경찰이 여전히 간섭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노숙농성 중인 부산합동양조(생탁) 현장위원회 조합원 김종학(55)씨는 "요즘 통 잠을 못 잔다"고 하소연했다. 차량 소음 속에서 한뎃잠을 자는 것도, 노사교섭이 번번이 틀어지면서 커지는 불안감을 견디는 것도 어렵기만 하다. 그래도 김씨는 "곳곳에서 찾아와 응원해 주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일 생탁·택시 희망버스가 왔을 때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정말 많은 힘이 됐다"고 빙그레 웃었다.

희망버스 탑승객인 밴드 '노래하는 나들'이 농성자들을 위해 즉석에서 노래공연을 펼쳤다. 참가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생탁·택시 노동자들은 우리의 노동을 아름답게 만드는 깃발입니다'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크레파스로 색칠했다. 현수막은 곧바로 농성장에 걸렸다.

고공농성 중인 심정보씨는 전화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노동자는 하나인 만큼 연대·단결로 승리하고 싶다"며 "찾아와 줘서 고맙고 꼭 이겨서 내려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희망버스 덕에 살았고, 위로받았다"

희망버스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희망버스 탄생을 알렸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였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조합원들의 손을 잡고 넘었던 담은 지금 더욱 높고 견고한 외벽으로 둘러쳐졌다. 높은 벽은 조선소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생긴 모양이다.

이날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한진중공업 사측과 부산경찰청측이 지회를 수없이 찾아오며 조선소 접근을 막으려 했다는 후문이다. 한진중공업지회 한 조합원은 "희망버스는 (그 사람들에게) 트라우마가 됐다"고 귀띔했다.

이달 5일 영도조선소에서 열린 휴업자 전원 복직기념 노사화합행사에 참여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희망버스는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갈등이 극심했던 만큼 희망버스에 불편한 감정을 가진 노동자들도 있다. 기업노조가 설립된 뒤 소수노조가 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교섭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행히 2011년 당시 해고된 조합원들은 이달 초 모두 복귀했다. 조선소 건너편에는 고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열사를 기리는 추모공원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지회는 조선소 내에 노조 사무실을 확보했고, 최근 추모공원 근처에 노조 회의실 겸 역사관도 마련했다. 그곳에는 고 박창수 열사의 자필 편지글과 송경동 시인의 시 '우리는 지지 않는다'가 걸려 있다.

탑승객들에게 김 지도위원은 "제가 이렇게 살아 있고 조합원들도 복직했다. 여러분들이 함께해 준 덕에 우리는 큰 위로를 받았다"며 "희망버스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희망버스의 의미를 기억하는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조합원 문권욱(36)씨의 말이다.

"희망버스는 회사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러 온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을 살리고 현장에 복귀할 수 있게끔 만든 힘은 바로 희망버스였다."

문씨는 2011년 정리해고자로 분류돼 조선소 안에서 농성을 했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3년간의 휴업기간을 버틴 끝에 올해 3월 복직했다. 첫 희망버스를 보낼 때 첫돌을 맞았던 딸 효주는 곧 다섯 살이 된다. 가족의 일상도 회복되고 있다. 그는 "정리해고 사태 이후 갈라졌던 노동자들의 마음 또한 차츰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일터 되길"

이날 탑승객들은 퇴근시간에 맞춰 조선소 정문 앞에 서서 노동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송 시인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입니다. 복직을 축하드립니다."

퇴근 행렬 중에서 이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반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탑승객인 양은숙 시인을 알아본 이용대 조합원은 양 시인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그는 김 지도위원 농성 당시 85호 크레인 중간지점에서 함께 농성을 했던 '85호 지킴이'였다.

"나 복직했다. (복직)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가 안 되더라. 포기 안 하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이씨의 말에 양 시인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 뒤로 송 시인의 외침이 이어졌다.

"저희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입니다. 노동자들이 더 존중받는 일터를 만들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