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열정적으로 대안사회를 논했다. 엄청나게 큰 거대담론에 몰입해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당시 젊은이들도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대학 캠퍼스 여기저기에서는 지향해야 할 체제의 내용이나 그것을 향한 변화의 방법론을 놓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언제부터 이러한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소비에트의 몰락과 외환위기 도래 같은 엄청난 구조적인 변동의 영향이 컸다. 현실의 실제 동학을 예측하지 못한 거대담론에 몰입한 지식인들은 자아비판을 하며 논쟁의 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실용주의적 혹은 현실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일상의 작은 문제에 대한 논의, 생활의 진보를 향한 방법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한 인식론적 전환은 변증법적으로 완성된, 미래지향적 선택은 아니었다. 패배주의적·청산주의적 기운이 묻어 있었다.

거대담론에의 열정적 몰입이 사라진 자리에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또 다른 거대담론이 소리 없이 자리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해 갔고, 실천을 제약했다. 세칭 '신자유주의'라고만 칭하고 말기에는 부족한 느낌의 무엇이었다. (좀 더 넓게 '경쟁력주의' 내지 '경제지상주의' 뭐 그런 정도의 흐름이라고 할까. 아니면 대중들의 입에서 “부자되세요!”라는 표현이 거침없이 통용되게끔 만든 어떤 큰 경향적 사고방식?)

사실 거대담론과 생활담론은 서로 대체가능한(substitutable) 관계라기보다 보완가능한(supplementable) 관계다. 거대담론 없는 생활담론은 방향성을 상실한다. 생활담론 없는 거대담론은 무책임 내지 무모함이다. 요는 둘 다 필요하다는 거다.

거대담론의 소멸은 방향성의 소멸이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표상에의 몰입은 한 시대를 이끌었고, 실천을 낳았으며 결국 우리 사회의 질서를 크게 바꿔 놓았다. 그런 류의, 시대정신과 사회적 과제를 표상하는 압축적이고 종합적인 화두가 지금 필요하다. 다만 새로워야 한다. 여전히 민주화라고 하는 거대담론에 의지해서 시대를 읽으려 한다면 매우 부족하다. 현실은 변했고, 세대도 바뀌었다. 새로운 시각에서 시대의 고통을 집약할 수 있는 거대담론 개발이 필요하다.

광우병 파동과 세월호 사건·메르스 대란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 가치갈등의 큰 구도는 다음과 같이 나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윤(profit)과 비용절감(cost save) 그리고 양(quantity)을 중시하는 흐름이고, 다른 한편으로 안전(safety)과 생명(life) 그리고 질(quality)을 중시하는 흐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이윤과 비용절감을 중시하고 안전과 생명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가치주창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 모든 비참한 재난이 이 사회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음에도 민주주의는 그것을 컨트롤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약자들과 희생자들을 비켜 가는 제도라면, 도무지 그것이 애초의 취지에 부합한 것인지, 발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거대담론을 매의 눈을 가지고 재구축해 가야 한다. 일자리 문제와 노동 문제 역시 그러한 대안적 가치에 기초해 고민해야 하고, 그것에 맞는 실천의 접점을 찾아가야 한다. 적어도 안전·생명·질의 중시와 같은 가치가 일자리와 노동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도록 대안적인 사회상을 그려야 하고, 그것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결집시켜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순환논리 같지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현실에 기반한 거대담론의 부족이다.

다만 지난 시기 거대담론에의 몰입이 한계를 보인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토착적 맥락과 유리된 많은 이론을 놓고 말잔치의 향연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거대담론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 우리의 맥락에 타당한 거대담론이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대중의 고통에 천착한 큰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파편적이고(fragmented) 반응적인(reactive), 힘없는 실천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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